0. 쇼트트랙은 매력적인 경기입니다. 짧은 트랙 위에서 선수와 코치진은 당 경기, 그 다음 경기까지 바라보는 전략을 세우고 선수들은 체력과 속도, 기술과 경기운영능력 등 다양한 재능을 종합해 빙판 위에서 순위를 다투죠. 여기에 선수들의 승부욕과 정신력이 더해지고 빙질과 운이라는 양념이 올려지면 데이터가 무색해지는 결과가 나오곤 합니다. 반농담 삼아 제가 친구에게 하는 말이 쇼트트랙은 나의 사행심을 채워주는 경기다... 라는 건데요. 특히 이번 소치가 그런 면이 더 두드러지는 것 같아 덕후 입장에서는 참 재미있습니다.

1.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내려준다고 하지요. 그 말이 제일 기쁘게 와닿을 팀은 역시 누가 뭐래도 중국팀일 겁니다. 비운의 천재 진선유가 부상으로 인해 은퇴한 후 전종목에서 꾸준히 패왕자리를 지켜온(물론 최근 심석희 선수 등 한국 선수들이 다시 올라오고 있지만요) 왕멍 선수가 올 1월 연습 중 발목 골절을 입어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게 된 후 일각에선 한국팀이 모든 메달을 휩쓸 거라고 전망할 만큼 위기를 겪었던 중국이지만 아시는 바와 같이 박승희 선수에게 닥친 불운과 마지막에 빛난 저우양 선수의 경기운영능력에 힘입어 두개의 금메달을 가져갔으니까요. 지난 시즌 어마어마한 경기력 향상을 보여줘 역시 남자부 메달은 이 선수가 쓸어갈 거라고 봤던 관록의 샤를 아믈랭(찰스 해믈린) 선수가 1000m에서 그렇게 긴장하고 실수하게 될 지는 또 누가 알았을까요. 무엇보다 심각한 부상과 잘못된 수술로 선수생명조차 위태로웠던 안현수 선수가 이렇게까지 전성기 실력으로 부활할 수 있을지는 최근의 유럽선수권을 보면서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내려주는 거고 그래서 올림픽 경기가 더 재밌다는 거 새삼 느끼는 요즘입니다.

2. 하지만 쇼트트랙이 재미없어질 때가 있었어요. 국대 선수들의 경기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국대 경기가 꼴보기 싫고 부끄럽다 여겨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멋모르고 쇼트트랙에 빠져들었다가 조금씩 지식이 쌓이면서 한국의 대표적 선수들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에이스로 '선택'되지 못한 많은 선수들의 희생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희생과 눈물이 멋져보이는 저 경기 장면 모든 곳에서 읽히기 시작했을 때는 쇼트트랙 더는 못보겠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흔히들 아시는 짬짜미, 팀플레이 그게 올림픽에서 메달을 쓸어온 한국팀의 동력이었으니까요.

3. 걸리면 징계지만 사실상 증거를 잡을 수가 없는 이 팀플레이를 한국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나라라도 한 조에 두 명 이상의 선수만 넣을 수 있다면 다 합니다. 특히 지금처럼 쇼트트랙이 상향평준화가 되고 한국 출신 코치진들이 각국에 포진해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의 팀플레이의 문제는 바로 우승을 할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이 체제에 불만을 품는 그 어떤 선수도 국대 선수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파벌이 생겨났다는 거죠.

4. 안현수 선수 얘기를 안할 수가 없네요. 안현수 선수가 처음 국대에 선발되었던 것은 02년 솔트레이크 시티 올림픽 전이었습니다. 이 때 한국에는 민룡과 이승재라는 좋은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김동성 선수도 있었구요. 안현수 선수는 주니어 대회를 휩쓸면서 엄청난 신예로 주목받고 있었지만 그만 국대선발전에서는 순위에 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민룡선수가 부상을 입은 것을 기회로 당시 전명규 대표팀 감독이 예비선수 명단에도 없던 안현수 선수를 지도자 추천으로 대표팀에 넣게 되었어요. 지도차 추천(이제는 없습니다)은 있던 제도니 문제성을 차치하더라도 안 선수가 대표팀에 들어간 건 있을 수 있는 경우죠. 문제는 안현수 선수가 차기 '에이스'로서 발탁된 거라는 거였습니다. 실제로 그 해 대회에서 민룡과 이승재 선수는 시니어 대회 경험이 전무한 안현수 선수에게 밀려 개인종목에 출전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솔트에서 안현수 선수는 기록이 좋지 않았고 이 일은 그 때까지 억눌려온 에이스 밀어주기의 희생자들의 가슴에 불을 댕겨 결국 눈에 보이는 파벌 싸움에 시발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안 선수는 그 해 시즌부터 모든 월드컵과 세계선수권을 씹어먹으며 토리노까지 가게 되었으니 전명규 당시 감독의 혜안이라면 혜안일 수는 있겠습니다.)

5. 이후 한체대(전명규측)와 비한체대 파로 나뉜 한국 쇼트트랙은 참... 네. 남자선수가 여자팀에서 훈련을 하고 여자선수는 남자팀에서 훈련을 하고. 선수들의 경기를 위해 전략을 알려줘야 할 코치진들은 감정싸움이 극에 달해 상대파벌의 선수들을 떨어뜨리기 위한 전략을 던져주는 일이 생겼죠. 그 유명한 06년 세계선수권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안현수 아버지가 공항에서 소리지르고 이호석 어머니도 같이 흥분했지만 알려진 바와는 달리 서로 싸우지는 않았던.. 이 때 부모들의 원망의 대상은 1차적으로 자신들의 파벌 싸움에 선수들과 경기까지 말아넣은 코치진들이었고 2차적으로는 어릴 때부터 동고동락해온 선수들이 그것도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결과를 빤히 알면서도 코치들의 전략지시를 따른 것이었을 거라 봅니다. 이 역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양 파벌의 선수들 그러니까 이호석 선수, 안현수 선수 모두 해당되는 일입니다.

6. 하지만 묘하게도 이 파벌 문제가 최고조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벌문제와 에이스 밀어주기 문제의 해결점이 보이기 시작한 것 역시 토리노 올림픽 때부터입니다. 파벌문제로 거짓말 좀 보태서 눈만 뜨면 코치가 바뀌던 04년, 05년을 지나 이러다가 정말 올림픽 죽 쑬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낀 쇼트트랙인들은 이 문제를 봉합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고 05년, 06년에는 각 파벌에서 코치를 세우는 걸로 봉합하되 한 선수를 밀어주는 것은 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파벌문제는 여전히 있었지만 역대 최고 성적 안현수(한체대파), 진선유(비한체대파) 동시 3관왕을 누리게 되었죠.

7. 그러다가 한국팀에 불운이 찾아오게 됩니다. 남 안현수, 여 진선유를 보유해 그야말로 든든했던 08년 두 선수가 차례로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된 겁니다. 공교롭게도 당시 쇼트트랙계에서는 국가대표 선발 방식을 바꾸려 준비 중이었습니다. 원래는 4월에 십여명의 선수를 뽑고 9월에 추가로 몇 명을 더 뽑는 방식이었는데 시즌이 9월에 시작하기 때문에 시즌 시작에 임박해 선수를 뽑는 기존의 방식이 문제라고 봤기 때문이죠. 사실 이 때 덕후들 사이에선 말이 좀 있었습니다. 시기를 조정하는 것은 좋지만 선발 횟수를 줄이는 건 아무래도 좋은 선수를 골라내는 거에 도움이 되진 않으니까요. 이게 발표된 게 2월, 안현수 선수가 다친 게 1월이다보니 안 선수를 노려 선발전을 앞당겼다는 루머가 나오기도 했는데요. 글쎄요. 일단 그걸 한체대파가 두고봤을지는 둘째치더라도 토리노 3관왕이자 비한체대파의 진선유선수 역시 이로 인해 대표선발이 안되었으니 그렇게 보는 건 억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빙상인들도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안현수 아버지가 자동출전권을 요구하기도 했었고 빙상계에서도 두선수에게 선수 자격부여에 대해 고민했었으나, 쇼트트랙 강국인 한국에서 선수들의 실력차이는 그야말로 스케이트 날 두께조차도 나지 않았으니 이 선수들에 대한 특혜는 한정된 대표 자리에서 다른 선수들의 기회를 뺏는 결과 즉 에이스 밀어주기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안현수 아버지도 결국 인정하기도 했는데요 박 대통령의 선발과정 감사 지시 후 인터뷰에서 국선 과정엔 문제가 없었다, 안 선수가 몸이 안 좋았다고 했죠. 이왕이면 좀 더 일찍 확언해주었으면 좋았겠지만요.

8. 이후에도 두 에이스에겐 행운이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습니다.재활을 시도하던 진선유 선수는 결국 선발전에서 순위에 들지 못하고 11년 23살의 나이로 은퇴를 하게 되었구요. 안선수 역시 수술이 잘못되어 재수술을 받으면서 심각한 부상 후유증과 슬럼프에 시달리게 되었고 엎친데 덮진 격으로 소속팀 성남시청이 예산 상의 이유로 쇼트트랙팀을 포함 스포츠 팀들을 해산해 소속팀 없이 운동을 하는 상황에 처한 겁니다. 더욱이 한체대 - 비한체대 파벌 다툼이 봉합되어가는 와중에 불행히도모 빙상인이 빙상계를 장악하게 되었고, 그 빙상인의 도움으로 국대에 들어갔지만 이후 그분의 커리어 설계를 따라주지 않아 눈 밖에 나버린 안현수 선수에게 (시기적 우연이기 어렵겠죠...) 그 어떤 팀에서도 영입제안을 주지 않아 안선수는 더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뒤 코치가 아닌 선수생활을 계속하고 싶었던 안 선수는 러시아행을 택하게 됩니다.

9. 에이스 밀어주기에서 벗어나 선수 개인의 재량을 중심으로 운영하기 시작한 한국 대표팀은 한 차례 선발전 파문을 겪기도 했지만 차츰차츰 파벌 문제를 뒤로 하고 선수간 관계회복을 바탕으로 해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한 때 국내에선 비길 자가 없다고 했던, 하지만 부상과 파벌다툼으로 대표팀 선발이 늦었던 조해리 선수가 대표팀에 있고, 비한체대 파로 알려진 최광복 코치가 대표팀을 이끌고 있다는 게 단적인 예입니다.(아 물론 이 사람이 선수 폭행 코치중 한 명이긴 합니다만... 나머지 한 명은 해설을 하고 있구요)
노골적 팀플레이를 지양한 후 네덜란드를 포함한 유럽 선수들의 약진과 꼬꼬마였던 샤를 아믈랭 선수의 대기만성 대마왕화를 등에 업은 캐나다 선수들의 도약과 전통의 강자 중국, 늘 무시할 수 없는 미국 등 현재 쇼트트랙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상향평준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서도 한국팀은 노진규, 신다운, 이호석 등의 남자선수들이 잘 해주고 여자팀 역시 혜성같이 등장한 심석희 선수를 비롯 박승희, 김아랑 등의 어린 선수들과 조해리 선수가 세계선수권과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어요. 다만 노진규 선수는 알려지다 시피 암투병으로 빠진 상황에서 남자 대표팀은 역대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신다운 등 어린 선수들이 노력하고는 있지만 쇼트트랙은 기술과 체력만큼 중요한 게 담과 관록 즉 경기운영능력이라 곧 이어질 세선부터 이번 대회를 거울 삼아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거라 생각합니다. 쇼트트랙의 재미가 성장하는 선수들 구경하는 맛이 있기도 하구요.

10. 감사가 들어간다고 하는데 부디 아무것도 안나올 대표선발전만 파고 들지 말고 지금의 저 모든 권한을 쥐고 흔드는 '한 명의 빙상인'에게까지 감사의 힘이 미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적지상주의까지 갔으면 좋겠습니다. 한 명만 사라진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많지 않습니다. 다만 과거의 뒤틀린 성적-영광을 등에 업고 모든 행정을 좌지우지하는 일만이라도 중단된다면 이미 변화를 시작한 한국쇼트트랙계에도 진짜 희망이 비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11. 제일 기다리는 경기는 남자 계주입니다. 패자 캐나다가 사라지고 까다로운 한국이 빠진 판에서 안현수, 블라드미르 + 구멍 둘로 불리던 러시아팀의 실력향상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기존 데이터가 별로 의미가 없어요. 이거야말로 제 사행심을 채워줄 경기가 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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