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서머스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청부살인업자입니다. 

의뢰받은 일 때문에 작가로 위장하게 되는데 작가 흉내도 내고 목표물을 기다리는 빈 시간도 메꿀 겸해서 자신의 지난 날을 재료로 수기 종류의 글쓰기를 하게 됩니다. 

소설은 암살자로서의 일과 수기를 쓰는 일이 병행되다가 뒤로 가면서 이 둘이 서로 간섭해 들어갑니다. 주인공 빌리의 글쓰기는 위장의 방편이었고 포크너 흉내로 시작되었는데 의뢰받은 일을 끝내고 잠수하는 시간에 이르며 점점 대체불가의 무엇이 되어 빌리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어릴 때를 돌아보고 청소년기와 해병대 입대 후 이라크 파병 경험을 더듬어 나가며 글을 쓰는 과정에서 현재의 자신을 갱신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작품이 어떤 이야기인지는 인터넷 서점에서 추천글 등으로 잘 소개하고 있어요. 저는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띄엄띄엄 느낀 점을 조금만 써보려고요. 스포일러는 피해가면서요.


1. 전체 24장으로 되어 있는데 디데이인 10장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6페이지 분량입니다. 두 전문가 '빌리'와 '스티븐 킹'의 뛰어남을 느낄 수 있었어요. 청부살인업자로서의 15년 경력의 프로패셔널함이 잘 드러납니다. 철저하고 꼼꼼한 준비로 새벽부터 진행된 디데이의 일정이 흥미진진합니다. 이동하고 숨기고 기다리고 저격하고 찾고 숨고...모든 것을 대비하여 짜여진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데 - 문장들이 연결되는데 스티븐 킹은 이 부분을 쓸 때 자신의 손에서도 땀이 차며 하루 일과 중 글쓰기로 정해둔 시간이 지나는 줄 모르고 타자를 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혼자 잠수 중인 1권의 마지막인 11, 12장이 좋았습니다. 암살자는 역시 혼자라야...제맛입니다.


2.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라는 작법 책을 냈잖아요. 저도 오래 전에 읽었는데 이런 책 가운데서도 술술 읽히고 재미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빌리 서머스'는 어찌보면 소설로,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서 '초짜에게 글쓰기가 갖는 의미', '초짜가 글쓰기의 실전에서 마주치는 문제' 등을 얘기해 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소설의 내용 전체가 글쓰기를 통한 만족감이나 각성의 측면으로 빗대어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세부적으로도 이라크 일을 쓰다가 망원 조준기 종류에 따른 성능 같은 걸 더 설명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면서, 다시말해 예상되는 독자의 범위랄지 세부 내용의 분배랄지를 고민하기도 하고 윌리엄 워즈워스의 '평온한 상태에서 소환된 강렬한 감정이 담긴 글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글'이라며 심란한 마음일 때는 노트북을 덮습니다. 또 찰스 디킨슨이나 에밀 졸라의 법칙이라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최소 두 번은 쓰여야 한다.' 같은 문장들을 머리속으로 웅얼거립니다. 


3. 스티븐 킹의 소설에서 아쉬운 점은, 좋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우정은 거의 종교 수준으로 철썩같고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가끔은 이런 것을 표현하는 대목을 읽을 때 민망함을 느낍니다. 이 소설의 빌리 역시 암살자라기엔 너무 순정남입니다. 마지막 한 탕을 획책하며 하필이면 작가로 위장해서 글쓰기를 하는 바람에 생긴 각성의 효과도 있겠으나 원래 '좋은' 사람이었던 느낌이고 빌리와 한편 먹는 이들도 바탕이 선량해서 서로를 재까닥 알아보고 무한신뢰하네요. 사건 따라가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걸핏하면 갈등에 빠지는 햄릿형이어서 심리 표현이 위주가 되는 것도 곤란하다 싶지만요, 이렇게 속이 투명하다니... 쬐금만 더 복잡한(회색의? 더러운?) 인간이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선량함이나 인간에 대한 태도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겠지요. 


4. 초판 1쇄를 사면 오탈자와 이상한 문장을 흔히 만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정치인들이 발이 빼자 후퇴했다. 앨리스는 입술을 꾹 다물고 이를 보이지 낳은 채 엷은 미소를 짓는다. 자네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그 아저씨는 손님방을 쓰라고 해.' 등등)

'대존잘'은 무슨 뜻인지. 엄청 존나게 잘났다? 소설 속에서 노인이 젊은 사람들 말 흉내 상황이긴 하지만, 음...번역자가 너무 일시적 유행어는 안 썼으면 좋겠어요. 


5. 아쉬운 점을 3에서 썼으나 킹의 소설 중에 이 작품은 손꼽히는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는 눈물이 맺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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