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프렌치수프

2024.07.12 18:30

Sonny 조회 수: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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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정성일 평론가님의 해설이 없었다면 평이한 요리 영화로만 착각하고 극장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초반부터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요리 장면은 뭔가 굉장하다. 그것은 카메라에 담긴 요리의 먹음직스러움 때문만은 아니다. 미완성의 요리가 식욕을 자극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하나의 요리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노동의 양과 강도를 주목하게 된다. 원재료를 굽거나 데치고, 거기에 들어가는 소스를 만들기 위해 다시 다른 고기와 야채들을 볶거나 끓이고, 그 국물을 요리용 깔때기로 붓고, 그걸 다시 굽거나 조리한다. 하나의 재료가 요리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계속되는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보기만 해도 지칠 정도로 부엌이라는 현장에서는 뜨거운 불과 무거운 고깃덩어리들이 쉴새없이 이동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검수하고 직접 요리하는 요리사, 외제니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외제니 혼자가 아니다. 미식가인 도댕이 또 다른 주인공이다. 가혹하다 싶은 노고의 결과물인 요리가 올라오고 그걸 양복입은 남정네들이 먹는 걸 보면 괜히 부아가 치민다. 그러나 부엌과 식사 자리를 둘 다 오가는 도댕이 있기에 한편으로는 계급적 분노가 조금 누그러진다. 이들은 맛있는 요리를 먹고 그것을 찬미하는데 진심인 사람들이다. 이 음식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유래는 무엇인지 지적이면서도 심미적인 감흥을 누리는 이들은 요리사가 늘 맞이하고 싶은 손님들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고된 요리가 진행되는 부엌과, 그 음식을 열심히 즐기는 식탁의 두 세계 모두를 보여준다. 이 후 영화는 도댕과 외제니의 애정 줄다리기로 이어진다. 도댕은 외제니에게 계속해서 구애하고, 외제니는 그것을 은근슬쩍 밀어낸다. 이것은 그냥 한 남자가 한 여자와 연애하는 이야기일까.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과,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의 줄다리기가 창조자와 비평가의 관계라는 해석을 믿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정확한 해석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내는 로맨스가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도댕과 외제니의 대화도 그 부분에서 해석을 해야할 것이다. "저는 당신의 아내인가요, 요리사인가요?" "당신은 나의 요리사요." "고마워요." 이것이 정말 연애 이야기라면 아내의 위치를 부정당하는데도 그걸 감사해하는 외제니의 인사를 해석할 길이 없어진다.

이것이 비평가와 창작자의 관계라면 외제니가 쓰러지고 난 뒤 뒤집힌 역할극은 의미심장하다. 비평가는 창작자에게 또 다른 창작을 제공할 수 있을까. 비평 자체가 하나의 창작 행위라면 그에게 또 다른 맛있는 비평을 계속해서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비평은 단순한 상찬이나 비난이 아니라 아직 나오지 않은 다음 작품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길이기도 하다. 아파서 쓰러졌었던 외제니는 도댕의 간호를 받고 잠시나마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다. 비평과 창작이 서로 존중하고 아름다움을 감각하면서도 공존할 수 있다는 이 은유는, 가능성의 여부와 다르게 믿고 싶어지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의 정사 장면은 나오지 않으나 도댕 앞에서 외제니가 누드로 있는 장면이 두번 나온다. 이 장면이 의미심장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그 장면이 품고 있는 회화적인 신성함 때문이다. 외제니가 등을 돌리고 물을 끼얹고 있는 장면은 앵그르의 [샘]을, 등을 돌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은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를 떠올리게 한다. 도댕이 외제니를 육체적으로 열망하는 것은 욕정 이상으로 외제니의 몸을 회화 작품처럼 보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유럽 특유의 과장된 찬사이면서도, '비평가'로서 자신의 욕망이 향하는 대상에 대한 도댕 자신의 최고급 극찬인 것이다.

이 때 외제니의 누드는 회화적인 속성 외에도 '요리'의 속성도 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초반부 외제니가 내내 요리하던 것은 끓는 물에 고기를 넣어 데치거나 삶는 형식이었다. 그는 첫번째 누드를 보여줄 때 공교롭게도 그 요리와 닮게 따뜻한 물을 계속 자신의 몸에 끼얹는다. 두번째 누드에서 외제니의 둔부는 도댕이 요리할 때 유리병에서 꺼내던 작은 표주박 모양의 과일의 형상과 닮아있다. 여성의 신체는 음식에 비유될 수 있는가. 남성적이면서도 대상화의 시선이 강한 이 장면을 다소 너그럽게 볼 수 있는 건 그것이 아마 도댕 자신의 주관적 시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그가 세상에서 제일 진지하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런 대상과도 겹쳐보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외제니가 결국 세상을 떠나는 것은 운명처럼 보인다. 아름다움이란 감흥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늘 찰나에 머물며, 그것의 잔향이 희미해질 때까지 의식 속의 기록으로만 더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댕이 외제니와 나눈 사랑이 확인되는 영화 속 두번의 장면은, 그가 늘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마침내 맞닥트리고 그것을 느껴낸 과정이다. 맛을 전달하며 음식이 뱃속으로 사라지듯, 외제니라는 사랑의 대상 역시 육체적 관계를 맺고 결혼이라는 사회적 약속까지 완수하면 결국 사라질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외제니가 세상을 떠나고 그가 원래 만들기로 했던 요리는 미제 상태로 놓여있다. 다른 요리사들이 도전해보지만 그것은 도댕과 그의 어린 미식가 제자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은 영영 상실된 상태에 놓이는 것일까. 도댕은 그의 친구가 들고 온 요리를 맛보고 그 요리의 주인이라면 원래 준비했던 레시피를 구현해줄 수도 있다며 찾아나선다.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아름다움이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영화는 음식을 다 삼킨 후에도 입안에 맴도는 잔향처럼 도댕과 외제니의 기억을 보여준다. 어떤 창작자는 쉬이 사라지지 않으며 비평가는 그것을 늘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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