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헬싱키에서.

2016.05.18 23:25

코르타사르 조회 수:3680

흠. 

일상 바낭입니다.

(안물안궁 주의)

일과 여행을 조금 양립하는 여행중(?)입니다.

이곳에 온 지는 일 주일이 조금 지났어요. 메트로 종점쯤에 있는 시내에서 먼 지역에 있다가 트램으로 금방 연결되는 시내로 들어왔죠.

오늘 이곳의 날씨는 매우 좋습니다. 다만 햇볕은 굉장히 따가워요. 간혹 장갑을 끼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덥더라도 그럴 만한 게 몇 시간만 햇볕을 쬐면

피부가 아주 따가워집니다.

막상 여행을 하고 있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일에 문제가 생겨서 3일째 컴퓨터 등등과 씨름중이죠. 

컴퓨터 부속제품을 잃어버려서 한국에서 사면 훨씬 쌌을 애플 매직마우스와 키보드를 사고,

호텔에서 월드뉴스를 보며 원고를 쓰는 둥 마는 둥 또 쓰다가 완전히 마는 둥 그러고 있군요. 


여성 솔로 트래블러로 말하자면 '헬싱키인'들과는 짧은 기간 거의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프랑스 여행 중에 질색하던 니하오, 아리가토우, 곤니치와, 곰방와 종자라고나 할까, 무작정 아는 아시아 말은 다 지껄이고 아는 척 하는 남자들을 보며

쟤들은 왜 그럴까, 했는데 우연히도 여기서 본 (여기에서는 길을 걷는데 갑자기 누군가 히죽거리며 아는 아시아 말 다 꺼내고 본다 같은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니하오종자가 역시 프랑스 남자라 쯧, 하기도 했죠. 곤니치와 니하오라면 다행, 카와이 이따이 카와이 이따이 뭐 이런 말을 하는 인간들도 있었으니까요.


외국에서 시간을 좀 보내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잠시라도 탈조선이에요.

약간 트라우마가 됐던 한국에서의 몇 가지 일들을 좀 잊고 있기 위해서였죠. 

한국에서 일종의 피해자가 된다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고 (가습기 살균제만 사도....) 뭐, 그런 피해에 어떤 사람들은 확률론을 제기하는 걸 좋아하죠.

신상에 험악하거나 나쁜 일이 생기면 그건 네가 운이 없었을 뿐이야, 일반화하지 마 (안했는데? 걍 내가 그랬다는데 해도 소용 없음)의 반응이 아주 흔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아무도 진지하게 타인의 문제를 들으려하지도 않지만 제가 몇 년 생각한 건 어떤 2차 가해와 같은 문제입니다.

어떤 피해들을 겪어서 그걸 공적인 창구로 해결하려 해도 그 2차 가해란 걸 받기 아주 쉽다고 느꼈어요. 자세한 얘기 같은 건 생략하겠지만요.

그래서 사고 점프를 좀 하자면 아 정말 질렸다 진짜 짜증이 난다, 그나마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는 데에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한국에서 여성 혼자 살거나 혼자 사는 나이든 독신 여성으로 보이면서, 동시에 안전하다고 느낄 만한 환경을 제가 구매할 능력이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죠.

가령 서울의 잘 사는 동네는 아니고 보통의 동네에 살지만 서울 집값이야 뭐, 그렇고요. 그 돈이어도 경비실부터 아파트 상가의 상인들과 내가 혼자 사는지 몇 살인지 

뭘 하길래 결혼도 안 했는지 이런 걸 파고들지 않을 프라이빗한 환경이 불가능하단 거였죠. 흔히 남의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안다고 하는 오지랖 말이죠. 

차라리 호텔 생활이 낫겠다. 적어도 몇 살인데 시집은 안 갔고? 물어보는 옆집 사람부터 갑자기 한국에서는 어떤 당연한 맥락이 진력이 났거든요.

아마 오랫동안 그 프라이빗한 환경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외국에 이방인으로 정착하겠다, 외국 천국 하는 나이브한 얘기는 아님을 전제하고 싶고요...


어릴 때 하이스미스나 잉에보르크 바흐만 같은 여성 작가들의 책을 읽다가 유럽의 이곳저곳을 살면서 작가 생활을 한 그들이 몹시 부러웠죠. 일단 1세계 여성들이겠지만...

+작가도 아니고, 외국에 나와 혼자 호텔방에서 랩탑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먹고사니즘 생활이 물론 어릴 때 동경했던 모호한 혼자 사는 삶의 양식과 비슷한 건 아니에요. 

서울에 살면서 어느 정도 내가 안전하다고 느꼈다면 전 만성 귀차니즘 환자로 그냥 집에 콕 박혀 비슷한 생활을 했을 거니까요. 그리고 비행기값은 아꼈겠죠(...)

뭐, 간혹 그래도 어릴 때 생각했던 것처럼 외국에 나와서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는 있으니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지도 몰라 하고 자기 위로하고 싶은 자신도 있지만 서울에서 얼마나 험한 일을 겪지 않고 얼마나 오랫동안 독신 여성으로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 경험상 회의적입니다. 

내가 법적으로 혼자인데 무엇인가 불쾌하고 갑을관계에서 한없이 을이 되는 나쁜 일이 생겼다, 그런데 문제제기하기 쉽지 않고 증거라는 걸 확보하기 어렵다면

채애애애애애증을 해 오시라고요오, 하는 고압적인 남성 목소리를 들으며 헤쳐나가려 하다 아이씨, 하고 마는 일들이 생기더군요.

혼자서도 노력하면 어떤 기본적인 안전권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지만 어른으로서 그런 환상이 깨진 거죠.

자신에게 일어나지만 않으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겠지.' 하는 일들이 있죠. 강남역 살인사건도 몇 발짝 떨어져서 팔짱끼고 여자가 운이 없었지, 하는 사람이 있듯이요. 

전 그런 사고방식이 아주 편리하게 느껴지는데 좀 전에 본 인도네시아의 여성성기 절단 뉴스 인터뷰에서 환하게 웃으며 이건 우리의 문화예요, 저도 제 딸(8살쯤 됐는지)을 이번에 할례시켜요

하는 해맑음 같은 걸 보면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할 지도 모르겠는 뜨악하고 멍한 느낌이 듭니다. 굉장히 객관적인 것 같지만 나이브하고 해맑아서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르겠는 막다른 길에

부딪힌 느낌. 

흠. 저는 여러 나라에서 약간 장기간씩 지내보고 제일 오래 지내기 좋은 도시를 생각해 볼 예정입니다. 언제까지나 임시적인 탈조선 생활을 기워나갈 수는 없겠지만요. 

(쓰고 보니 헬싱키와 무관한 글이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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