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같은 영화

2015.10.11 10:07

로치 조회 수:3352

드라마 연애시대를 백 번 봤어요. 과장이 아니에요. 각 잡고 보는 것만 보는 게 아니라면요.

틀어 놓고 책 읽고, 틀어 놓고 청소하고, 틀어 놓고 운동하고, 틀어 놓고 어쩌구 저쩌구...

FPS 게임을 해도 싱글 플레이만 죽어라 해서 어느 지점에서 수류탄이 날아오고 그런 거 꿰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글 플레이만 계속하는 이상하고 지루한 인간, 그게 바로 저에요.

그래서 어느 지점에서 어떤 장면에 어느 대사가 나올지 알고 있어요. 

방바닥에 무릎을 꿇고 걸레로 바닥을 훔치다가도 정확한 타이밍에 이하나 씨와 함께 말 하는 거죠.

"양념 꼬치"


공기같은 영화들이 있어요. 바다로 치면 인천 짠물. 동해의 격동, 남해의 호방함과는 확실히 다르죠.

물때 잘못 맞춰서 가면 물이랄 것도 없는. 그런데 그게 또 묘한 매력이 있어요. "내가 바다드냐...?" 하는 무심함.

바다라고 찾았지만 바다는 그저 이름일 뿐. 그래서 그렇게 많은 불륜 커플들이 서해를 찾나봐요.

(바다는 됐고, 어서 서두르세... 음란함을 촉구하는 비일상의 일상성)

그런 영화들은 감정을 끓어 오르게 하는 미덕은 없죠. 그래서 "연애시대" 처럼 두고두고 계속 볼 수 있어요.

곁눈질로, 주구장창, 질리지도 않고.


제 경우엔 "내가 고백을 하면" 이 그런 영화에요. 

조성규라는 별 재미는 없는 사람이 만든 영화인데, 김태우 씨와 예지원 씨가 나오죠. 

내용은 대충 이래요. 영화 제작자이며 서울 남자인 인성과, 간호사이며 강릉 여자인 유정이 각자의 일상을 지겨워 하고,

서로의 일상을 동경하면서 주말마다 집을 바꾸었다가 뻔한 갈등을 겪죠. 그 갈등의 끝은 연애의 시작. 

이 영화의 미덕은 단연코 뻔함이에요. 거창하게, 먹고! 마시고! 사랑하라! 외치지도 않아요.

그냥 먹는 게 좋고, 마시는 것도 좋다보니 어쩌다 사랑도 하게 되었더라.

그 일상의 모습에서 공과금 지로용지 빼고, 욕실의 곰팡이 빼고, 개수대에 자라난 버섯 빼버린 뒤,

그 빈 곳에 (감독이 사랑하는)유재하의 노래를 깔아 놓으면 정체모를 뭉클함과 충만함이 자욱해 지는 거죠.

그걸 재주 좋게 잘 꾸려 놓으면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이 되는 거고.


어제 "매드 맥스" 를 봤어요. 기타맨이 불뿜으며 연주하는 장면에서 오오!!! 절대간지!!! 감탄도 했는데, 

그런 영화, 보고나면 기운 빠져서 다시 보려면 두어 달은 쉬어줘야 하잖아요.

그제 지어서 밥솥에 누워 있는 흰 쌀밥 같이 무심한 화면, 갈등, 화해가 더 위대하게 다가올 때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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