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비유. 생산적인 토론의 태도

2011.04.24 00:12

hj 조회 수:2179

이 글은, 최근에 메피스토님의 한 게시물 http://djuna.cine21.com/xe/board/2129620 에서 했던 댓글토론에서 제가 어떠한 태도를 왜 고집하고 상대방에게도 강요하였는지에 대한 설명인 동시에, 생산적인 토론의 태도에 대한 저의 일반론적인 생각입니다. 가끔 나올 인용글은 예시하기 위해 끌어오는 것이지, 다시 그 토론을 되살리기 위함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즉 이 글은 토론 그 자체에 대한 글입니다. 


한가지 오해부터 풀겠습니다. 메피스토님께서는 제가 "상대방에게 무례 운운하면서 자기는 무례한 언사를 한다" 고 지적하셨습니다. 제가 무례했다는 지적은 옳습니다. 저는 몇차례 예의의 선을 넘어갔습니다. 저도 토론에서 예의를 지키느라고 할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메피스토님께서 오해하신 것은, 저는 무례하게 굴지 말아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무례한 수사'를 쓰고 있는것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무례함에 대해 그다지 엄격하지 않습니다. 태도나 형식이 다소 무례해도 그 안에 내용이 제대로 담겨있다고 하면, 그 무례는 무시하고 내용에 대해서 토론하고 논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레토릭은 다릅니다. 무례한 레토릭은 아무 내용이 없이 무례한 태도만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반박할 수도 없고, 토론도 불가능합니다. 레토릭은 레토릭으로만 상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토론은 사라지고 무례만 남습니다. 저는 그렇게 되는 것이 싫습니다.

제가 한 "A 라고 말하는 것은 꼰대의 언어가 아니냐" 라는 말은 무례하다고 할 수는 있으나 레토릭이 아닙니다. 좀더 예의를 차리자면, '기성세대의 언어가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만, 제 논지 자체가 "꼰대의 태도로 꼰대를 비판한다" 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단어를 고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저 말은 "나는 A 라고 한 것이 아니다" 라거나, "A 는 꼰대의 언어가 아니다" 라는 말로 논박이 가능합니다. 제가 '무례한 수사' 라고 하는 것은 "내 글을 읽기나 한 것인지 헷갈린다" 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레토릭은, 내용은 없고 무례함만 있어서 반박이 불가능합니다. 

넷상의 토론에서 이러한 수사는 너무도 많이 쓰입니다.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난독증이군요' 와 같은, 단순하게 상대를 자극하고 기분이 상하게 하려는 의도로 쓰여지는 언사입니다. 저는 어느정도 토론이 계속될 것 같으면, 수사를 사용하지 말아주기를 기대하고 종종 지적하기도 합니다. 수사는 토론에 방해가 될 뿐이고, 저는 그런 언어를 쓰는 사람과 토론을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듭니다. 그것은, 상대가 비꼼의 언어를 사용하여 제가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라, 수사를 즐겨 쓰는 것이 그 사람의 수준을 나타내 주기 때문입니다. 논리가 아닌 자극이나 비꼼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상대는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고, 존중할 마음이 들지 않는 상대와는 토론을 할 마음이 사라집니다.



물론, 저도 수사를 썼습니다. 메피스토님께서 지적하신 "솔직해지지요" 입니다. 저는, 그것이 수사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썼습니다. "A라고 쓴 것은 결국 B 라는 이야기인데, 그걸 슬쩍 흐리려 하다니 그건 솔직하지 않잖아" 라고 생각을 하면서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쓰여지고 나면 그것은 결국은 수사입니다. 굳이 그런 수사를 쓰지 않고 'A 는 실은 B 라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라고 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메피스토님의 반응을 보고, 저는 그 수사를 쓴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 단락은 메피스토님의 글의 의도를 확인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고, 제가 기대했던 반응은, "맞다. A 는 B 를 말하는 것이다." 이거나, "아니다. 나는 B 라는 의도를 갖지 않았다." 였습니다. 저는 그 의도를 확인해야 제 논의를 진행시킬 수가 있습니다. 어차피 제 글의 시작이 메피스토님의 글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에, 원글의 의도를 거듭 확인하지 않고서 제 논지를 끌어가는 것은 헛손질이 될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상대방의 반응은 제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제가 확인하고 싶었던 부분이 아닌, 수사 자체에 집중을 해버려서, "솔직해지자니, 이제 자신의 추측을 강요하는 거냐" 라고 받아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때문에, 수사를 쓰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해야합니다. 레토릭을 레토릭으로 받아치기 시작하면 토론은 산으로 가버리는데, 어쨌거나, 그 부분에서 먼저 레토릭을 쓴 것은 저이기 때문에 할 말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시에는 이것이 레토릭이 아닌가, 레토릭이라면 허용될만한 수준의 것인가 항상 생각을 하며 글을 써야 합니다. 이번의 꽤 긴 토론 동안, 제가 레토릭을 쓰는 것인가 의식하며 쓴 것은 세번인데 하나는 '허약한 논리' 라는 구절이었고, 다른 것은 상대방의 비유에 대해 '초등학생들에게 설명할 때를 위해 남겨둬라' 라고 한 것과 '새 얘기를 또 하면 나는 부끄러워 쥐구멍에 숨겠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허약한 논리라는 것은, 제가 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반박으로 "나는 당신의 글을 이해하고 있고, 그 논리가 허약하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에 레토릭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나머지 두개는 레토릭이 맞습니다. 알면서도 쓴 것은 저는 그 새의 비유가 거듭되는 것이 짜증스러워서, 제가 그걸 유치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런 레토릭을 씀으로써 제 수준이 드러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겠어요. 그정도의 수준인거죠. 그 외에도, 제가 의식하지 못하고 쓴 필요없는 수사들이 있겠죠. 열심히 고민하고 써도, 은연중에 쓸 수밖에 없기때문에, 더 조심해야 됩니다.



그 다음이 비유입니다. 토론중에도 이야기했듯이, 비유는 논지를 이해하기 쉽게 다른 말로 풀어주는 것일 뿐, 그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그 논지가 서로에게 이해되고 난 이후에 자꾸 비유로 되돌아가는 것은 토론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비유는 토론의 대상도, 논박의 근거도 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논지의 근거로 어떤 비유를 들었을 때에, 그 비유를 논박하면 더 적절한 다른 비유를 들이대게 됩니다. 

비유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한다 해도, 그것이 논지가 틀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는 일종의 가정 이고, 세상에는 수많은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여러 가정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비유의 언어는 토론의 영역이 아닙니다. 비유를 진지한 토론의 영역으로 끌어왔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는, 한 시트콤의 매력적인 캐릭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봐, 레너드. 너의 비유는 틀렸어. 그 새는 다치는 순간을 통해 정신적 트라우마를 갖고 있을 지도 몰라. 혹은, 애초에 한번도 날아본 적이 없었을 지도 모르지. 또 어떤 상처를 얼마나 깊게 입었는지..."


제가 강만수의 비유에 대한 보론을 뒤로 미루었던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저는 강만수의 비유를 제 논지의 '근거'로 삼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설명'으로부터 '태도'가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어떤 설명을 하면 듣는 이는 태도에 대해 지적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는 데에, 그냥 편리하게 그 이름을 가져다 쓴겁니다. 그 누군가는 강만수건, 누구건 상관이 없고, 굳이 비유를 쓰지 않았어도 되었습니다. 저는 '누군가' 라고 하는 것보다 만만한 한 인명을 갖다 쓰는 것이 읽기에 좀더 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여기에서, 원래의 논지가 아닌, 비유나 예시를 논박의 대상으로 삼아 공격을 해오면 다시 토론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유시민이 '미숙아'비유를 썼을 때, "미숙아는 인큐베이터에 있어야지" 라고 받아친 전여옥에게, "그것은 비열한 인용이다" 라고 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언뜻, 논리에서 전여옥이 이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올바른 토론으로 가려면, 비유로부터 다시 논지로 돌아가, "지금의 대통령의 미숙함이, 그렇게 돌봐주면서 미래를 기다려 줄만한 수준의 것인가" 로 갔어야 합니다. "인큐베이터에 있어야지" 라는 말은 비유를 꼬투리삼아 수사로 공격한 것일 뿐, 토론에서 상대의 논지와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예시삼아 쓴 한 문단에서 '강만수'와 '환율방어'라는 단어에 집중하여, 이 부분에 대해 논박하여보아야, 저의 논지와는 상관없는 것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생각하는 생산적인 토론의 자세에 대해서입니다. 토론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시키고 설득하고자 하는 과정입니다. 상대방이 틀렸다는 것을, 혹은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 '승리하고자 하는' 태도는, 토론이 아니라  말싸움의 영역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최근의 넷상의 토론은 대개 이러한 '말싸움' 의 양상에 머물고 맙니다.  

인터넷상의 토론이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어떤 사람이 글을 쓰고, 다른 사람이 그 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때에 이의를 제기한 상대방을 이해시켜 설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 이해해야 합니다. 즉,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가. 나의 글의 어떤 면이 당신에게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켰는가" 를 묻고 확인해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대개의 넷상의 토론의 경우에서는 "내 글을 읽고 그런 말을 하다니, 당신은 내 글을 이해하지 못했다" 는 식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은, 토론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상대방이 자신의 이의에 대해 곡해라고 주장한다면, 자신이 이해한 것이 맞는지. 혹은 자신이 어떤 점을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 거듭 확인해야 합니다. '당신이 말한 것이 이 뜻이 아닌가?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가?' 라고 계속해서 자신이 이해한 내용의 근거를 상대방에게 제시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이러한 확인과 이해의 과정을 빼고서 좋은 토론이 있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말을 조금씩 다른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다른 단어를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니까요. 서로의 의도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내가 상대방을 곡해하고 있을 가능성도 항상 있습니다. 의견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평행선을 그리며 달려갈 때, 우리는 항상 처음으로 돌아와 무엇으로부터 그 차이가 나온 것인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토론은, 정반합의 과정입니다. 먼저 나와 상대방의 입장의 차이를 확인하고, 그 차이를 좁히면서 나와 다른 시각까지 포용하여 자신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생산적인 토론의 결과입니다. 이러한 토론을 통해, 우리는 "아, 저런 시각도 있구나." "나의 말을 저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배우고, 조금 더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넷상의 토론에서 - 특히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한 토론에서 이러한 생산적인 토론의 과정을 보는 것은 지금은 드문 일입니다. '키보드배틀' 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다름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상대의 논리를 꺾어 이기고자 하는 것이 토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된 것은 메피스토님과의 토론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만, 그이전에 넷상에서 벌어지는 토론들을 보면서 느끼고 아쉬웠던 점들이 그 안에 잘 드러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도저히 그 차이를 좁힐 수 없고, 상대방의 다름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김규항과 이건희가 토론을 통해 상대방의 입장을 긍정할 수야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민주당 지지자와 유시민 지지자, 혹은 민노당 지지자와 진보신당 지지자간에조차 생산적인 토론이나 합의의 과정은 커녕, 서로를 타자화하여 괴물로 만들어 버리면서 최소한의 토론의 외피를 갖춘 대화도 시도하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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