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란 안 홍 감독이 '일본영화'라는 도구를 가지고 완전히 자기 영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가지고 자기 영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이 가졌던 정서를 깊이 있게 파악하고, 그것을 매우 성공적으로 자기 스타일로 표현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이런 건 기대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원래 매우 큰 핸디캡을 가지고 시작한 영화였죠.

완전 다른 문화권의 작품인데다

(일단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생소했겠죠)

감독이 일본어를 잘하지 못할테니 연기지도 같은 건 완전 제대로 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사 지도 같은 거에는 완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근데 영화는 글 처음에서 말한 세 줄을 완전히 해내고 있었습니다.

영화의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드신다는 분들이 많던데

영화를 이야기만 가지고 평가하려는 거 자체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구요

일단 끝내주게 뽑혀져 나온 영화의 스타일만 가지고도 만점을 주고 싶습니다.


일본사람들과 일본어 대사가 나오는 영화로 이런 영화가 나올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죠.

어떤 일본 감독이 만들었어도 이 감독이 만든 것 이상을 만들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작자가 누군지 모르지만 안목이 탁월했다고 칭찬하고 싶네요.




영화의 스타일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보면

확실히 트란 안 홍의 영화를 보고 있다고 느꼈구요

좀 힘없이 늘어지는, 그런 왕가위 느낌이 좀 있었고

왠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영화 느낌도 좀 나더군요



영화가 전체적으로 힘없이 늘어지고 편안한 듯 하면서도

굉장히 쎄게 들이대는 장면이 3개가 있었는데

1. 요양원에서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풀밭에서 이야기하던 장면

    → 바람이 엄청나게 부는 상황에서 두 사람이 그렇게 평이하게 대화하는 상황 자체가 아주 쎄게 들이대는 걸로 느껴지더군요

2. 와타나베와 하츠미가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가면서 하츠미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음악과 함께 하츠미의 얼굴을 풀샷으로 들이대던 장면

3. 나오코가 죽고 와타나베가 해변에서 오랫동안 절규하던 장면

    → 이 장면은 20세기 초현실주의 영화들과 20세기 현대음악의 성과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듯 하더군요




음악도 훌륭했습니다.

저는 '노르웨이의 숲'이니까 당연히 비틀즈 노래가 쫙 깔릴 걸로 기대하고 갔는데

비틀즈 노래는 진짜 '노르웨이의 숲' 하나밖에 안 나오고

(솔직히 그건 좀 실망하긴 했는데)

다른 노래들이 나왔는데 모두 괜찮았습니다.




영화는 엄청 모던합니다.

원작자 하루키의 모던함은 요즘말로 하면 뭔가 허세가 심하다고 까일 정도로 희화화되기도 하는 모던함인데

그런 모던함을 감독이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했습니다.

영화가 처음에는 그 모던함을 약간 놀려대는 느낌으로 영화화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그게 아니라 그 모던함 자체를 아주 "진지하게" 대면하고 집중해서 영화화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뭔가 존경스럽게까지 한 느낌? 허허)




저는 영화관을 나오면서 명품 영화를 봤다는 생각에 매우 만족스러웠는데

인터넷의 평을 둘러보니 악평이 대세더군요.

대부분 원작과 단순비교해서 자기 생각에 다르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가지고 까는 거 같은데

엉터리 비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원작 무척 좋아하는데

이건 감독이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어느 장면 하나 대충 원작에 묻어가려는 생각 없이 진짜 모든 장면을 제대로 고민해서 만든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를 원작에 비해 구리니 어쩌니 하는 평이 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몇 자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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