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작가, 굶어죽은 베짱이

2011.02.09 09:52

LH 조회 수:5099


이전 김유정이 죽기 열흘 전 남긴 편지를 읽었습니다.
살고 싶다고, 제발 돈 좀 보내달라고 애걸하는 한 줄 한 줄은 애처롭고 비굴하다기 보다는, 그의 안에서 그와 함께 죽어가는 글들이 이대로 사라질 수 없다고 외치는 비명 같았습니다.
겨우 20대 초반의 나이에 병과 굶주림으로 죽지 않았더라면, 그는 더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겠지요.

인간의 역사는 발전한다고들 하지만, 그 때와 지금이 그리 다르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그냥도 아니고, 재능을 가진 작가 분이 춥고 어렵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니, 어이 없어 가슴을 치고 하늘을 보네요.

다른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글 쓰면  된다, 라고 말하는 분들도 많겠지요.
하지만 직장을 다니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굳이 비유하자면 정규 근무를 하는 앞에는 어학원을 다니고 퇴근 이후로는 파트타임 알바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네, 해낼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가능하진 않아요. 그렇지만 굉장히 힘든 일이고, 할 수 있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게다가 글을 써내는 것이란, 인풋과 아웃풋이 언제나 비례하지 않습니다. 반지의 제왕이 완결되는 데 15년 밖에 걸리지 않은 게 양호할 정도로요.

게다가 돌아가신 그 분은 일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일을 했어요. 그 나이에 국제상도 수상했고, 5편이나 계약을 했다는 것은 대단히 성실하고도 왕성한 작업량입니다. 다만 댓가가 돌아오지 않았을 뿐이고, 그게 생활고로 이어진 거지요. 

가장 슬픈 사실은 이렇게 재능을 가진 사람이 굶어죽었다는 사회적인 비극을 두고 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냐는 겁니다.

죽은 사람더러 왜 일을 하지 않았냐, 라던가. 주변의 가족이나 아는 사람들더러 왜 돕지 않았냐, 라던가. 심지어 많은 개런티를 챙기는 배우들을 욕하는 글 마저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묻고 싶네요. 이렇게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이 세상은 바뀌지 않았나, 라고. 영화계 관행이 얼마나 썩어있는 지는 다른 분들이 많이 말씀하신 듯 하니 제가 굳이 말할 필욘 없겠지요.

책을 내는 작가의 사정도 다를 바 없습니다. 돈 떼 먹기, 계약만 하고 책으로 안 만들기, 부수 속여서 돈 안 주기... 한 두번의 일이겠습니까. 저 스스로 그런 과정을 지켜본 적도 있습니다. 회사 나름으로 고충이 있겠지만, 정규 수입이 없는 작가에게는 정말 돈 한 번 들어오는 게 얼마나 굉장한 생명줄인지.
다른 문화예술계 직업군의 사정도 마찬가지일 듯 합니다. 아니, 직업이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어제 지인분께서 트윗에 이리 말씀하시더군요.
그 돌아가신 분은 옆집 사람에게 먹을 걸 달라고 하지 말고, 나라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어야 한다고. 그래야 마땅하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지 멀쩡하고 젊은 여자에게 무슨 국가기관이, 라고 할 분들이 꽤 많겠지만 이른바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거지요. 사람이 어떤 상황에든, 내일을 위한 꿈을 꾸며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게 하는 것. 지원금 어쩌고가 아니라 당장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것.
외국에서 살아보니 그게 정말 피부로 와닿습니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그리 가난한 지경도 아닌 사람에게도, 당장 먹을 것을 받을 수 있는 푸드 뱅크를 이용할 수 있고, 의료비 역시 무상으로 지원됩니다. (지금 저만 해도 식품을 살 수 있는 수표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극빈층이 아닌데도요.) 혹자는 이를 두고 사회적 낭비라고 하겠지만, 이 세상의 많은 문화적 유산들은 일반적인 삶을 포기한 자발적인 실업자들에게서 만들어졌습니다. 가난에 시달린 예술가들은 하 많으니 굳이 말할 건 없겠지만, 어르신들 귀에 쏙쏙 들어올 만한 예를 든다면 역시 조앤 롤링이겠지요. 그녀는 미혼모에게 지급되는 보조금을 받아가며 근근히 글을 썼고, 결과적으로 그게 어마어마한 국가적인 이익을 가져왔지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만약 좀더 성실하고 유능했더라면 해리포터는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작가는 그리 뛰어난 일꾼이 아닙니다. 소심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다보고, 세상 물정에 어둡다보니 사회생활 해도 이상한 사람으로 놀림받기 일쑤지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 복지는 단순한 낭비가 아니라, 그 사회의 미래를 위한 투자이지요. 허나 이 세상은 당장 번듯하고 으리으리한 결과가 나와야만 직성이 풀리는 높으신 분들이 너무 많다보니, 문학도 예술도 학문도... 무엇보다 사람 생명도 차근차근 말라죽어가고 있습니다.

개미는 굶어죽은 베짱이를 비웃었지만, 음악도 노래도 없이 살아가는 일 뿐인 삶이란 얼마나 척박한 건지.

저 자신도 그다지 다를 바 없는 글쟁이의 처지이므로
먼저 떠나간 김유정 선생님과 최고은 씨에게 차 한 잔 올립니다.

따듯하세요.

p.s : 
이젠 고 최고은 작가의 시나리오, 라는 카피와 더불어 영화가 만들어질 거 같아 씁쓸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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