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작가들은 주인공 탐정 캐릭터를 중심으로 시리즈물을 만드는 전통이 있습니다. 에드거 알랜 포의 오귀스트 뒤팽에서 시작해서 시리즈의 전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는 셜록 홈즈 이후로 수많은 탐정 시리즈가 존재합니다. 제가 추리소설의 재미를 처음 알게 된 1980년 초대에도 셜록 홈즈나 괴도 괴도 루팡 시리즈는 대부분 번역이 되어서 도서관에 있었고, 애거서 크리스티는 전집도 나와 있었어요. 물론 이중에는 완역이 아니라 좀 편집된 번역판도 있었고, 번역 자체가 부실할 때도 있었지만 나중에 완역본이 나오기 전에는 그런 사실 자체를 모르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탐정 시리즈들 중 당연히 극히 일부만 번역되었고요. 시리즈 대표작만 번역본이 나온 경우가 많은데 어떨 때는 참 답답했습니다. 맘에 꼭 든 탐정이 있고, 관련 시리즈로 뭐뭐가 있다고 책 해설에 적혀있는데 한글 번역본이 없어요! 어느 정도 영어가 깨인 다음에는 원서라도 구해서 읽고 싶지만 그때는 원서도 매우 드물었거든요. 특히 추리소설 같은 대중문학 영어 원서는 공공도서관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쯤 되서 인터넷이 대중화되자 해외 사이트를 통해서 원서를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외 배송으로 구입하는 원서는 비쌌고, 전공 관련 도서라면 모를까 재미로 읽는 추리소설을 그렇게 구입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추리소설은 초소형 페이퍼백이라는 아주 합리적인 가격대로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페이퍼백을 모으기 시작한 추리소설은 렉스 스타우트의 네로 울프 시리즈였습니다.


국내 추리소설 전집에 있는 대표작인 요리장이 너무 많다를 읽으며 이 미식가 탐정의 매력에 흠뻑 빠졌었는데요. 원서로 1권인 독사부터 읽기 시작하니까 온천 휴양지에서 벌어지는 요리장은 울프가 집을 떠나 벌어지는 상당히 드문 사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뉴욕의 자기 집을 절대 떠나지 않고 자기 일정을 죽어도 고수하는 괴짜 탐정의 세계는 첫 권에서부터 거의 완벽한 완결성을 가지고 마지막 권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아직 마지막 권을 못 보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는데요. 제가 소형 페이퍼백을 구입해서 보던 시절에는 이미 페이퍼백이 절판되기 시작해서요. 네로 울프 시리즈 전체 46권 중에서 한 절반 정도는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흥미로운 책들이 먼저 나가기 때문에 진짜 궁금한 책인 여자들이 너무 많다나 울프의 과거를 암시하는 블랙 마운틴같은 책은 절판이었습니다.  


근데 다시 몇 년이 지나니 전자책이 상용화되기 시작합니다. 안그래도 책장에 넘치는 책들이 부담스러웠는데 이걸 전자책으로 모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절판되었던 책들을 하나 둘씩 전자책으로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 건강 문제로 집에서 쉬면서 뭔가 가볍고 흥미로운 책들을 실컷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네로 울프를 첫권부터 마지막까지 읽어 보자는 계획을 세웠고요. 시리즈 순서대로 읽기 시작하되 중간 중간 못 구한 절판본들은 전자책으로 구입해서 보기로 합니다. 이렇게 순서대로 원서로 읽다 보다 보니 언어를 까다롭게 사용하는 네로 울프의 원래 표현이 궁금해서 유일한 번역본인 요리장이 너무 많다도 결국 원서로 다시 구입했습니다.


처음에는 몇십권이 넘는 시리즈가 비슷비슷한 구성이라니 좀 지루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도 잘근잘근 씹어먹는 재미가 있습니다. 범인이 누구라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네로 울프와 아치 굿윈 두 주인공들이 티격태격하는 성격묘사의 디테일들이 재미있고 언어를 세련되게 사용하는 스타우트의 표현들이 좋아서 어떻게 읽어도 흥미 진진합니다.


책 머리에는 여러 작가들이 추천사 같은 글을 써 놓았는데 그중에는 스타우트 사후에 네로 울프 시리즈를 이어서 쓰는 모 작가에서부터 동료 추리소설 필자까지 다양합니다. 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네로 울프 책에서부터 작가인 스타우트와의 인연까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들의 사연을 읽으면서 내가 왜 이 시리즈를 이렇게 즐기는지 설명할 수 있는 한 구절을 찾았습니다.


어떤 여성 작가가 자기가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를 늘어놓은 서문 마지막에

“Let The Misogynist Suffer”

라고 적어 놓았거든요.


주인공 울프는 전반적으로 사람을 안 좋아하지만 특히 여자를 싫어하는 여성혐오자인데요. 대부분의 사건에는 의뢰인에서부터 증인, 범인까지 당연히 여자들이 역할을 하고요. 이 게으른 명탐정이 본인의 호화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하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게 상당히 즐겁거든요. 그래서 저의 네로 울프 전집 도장 깨기의 구호로 삼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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