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22 16:17
저명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시인인 엘 리드에게 아직 틴에이저인 손녀 세이지가 찾아옵니다. 임신해서 낙태를 해야 하는데 600달러만 보태줄 수
있냐고요. 하지만 엘은 얼마 전에 죽은 배우자 바이올렛의 병원비를 몽땅 갚는 바람에 집에 현금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격이 안 좋아 주변에 돈을
빌릴 만한 친구도 별로 없고 그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상당수가 지금 모두 다른 데에 있습니다. 한 동안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바이올렛의 낡은
차에 올라탄 엘은 세이지와 함께 낙태비용을 구하려는 대모험을 떠납니다.
[그랜마]는 [아메리칸 파이]의 폴 웨이츠가 내놓은 신작입니다. 오래간만에 그가 직접 써서 내놓은 오리지널 각본 영화고요. 남성작가가 썼다고
보기 어려운 내용인데, 웨이츠는 엘을 연기한 릴리 톰린과 잠시 함께 일을 한 뒤로 톰린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계획해왔다고 합니다. 각본에
톰린의 피드백이 충실하게 반영된 건 당연한 거고요.
작가/감독의 성이 무엇이건, [그랜마]는 물 흐르듯 능청스러운 영화입니다. 할리우드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서커스를 하고 있는데, 이게
정말 자연스러워요. 그 서커스란 레즈비언/페미니스트 커뮤니티 안에 있는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경직되지 않은 캐릭터 코미디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 초판본이 너무나도 당연한 소도구로 등장하는 영화예요.
주인공 엘도 참 대단한 캐릭터입니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명성과 경력을 쌓은 70대 노인이지만 여전히 꿈틀거리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이죠.
몇십 년 동안 같이 살았던 배우자를 떠나보냈지만 한참 어린 제자와 연애를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손녀를 차에 싣고 이리저리 돈을 빌리러
다니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엘은 끊임없이 성격 결함을 노출하며 주변과 충돌하고, 과거의 실수와 마주치고 이를 되씹으면서도 결코 자신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소동의 90퍼센트 정도는 모두 엘이 적극적으로 유발한 것입니다. 같이 사는 사람은 힘들겠어요.
하지만 보기는 정말 재미있죠. 영화는 힘들이지 않고 술술 엘의 캐릭터를 쏟아대는 릴리 톰린의 근사한 연기 덕 역시 보고 있습니다. 기죽지
않고 톰린과 맞장을 뜨는 다른 사람들도 만만치 않지만요. 캐스팅이 좋은 영화입니다.
80분 조금 못 되는 짧은 영화이고 주인공의 여정 역시 동네 주변을 빙빙 도는 정도에 그치지만 주제의 무게와 이야기의 재미는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스케일이 꼭 영화의 질과 비례하는 건 아니죠.
(15/09/22)
★★★☆
기타등등
엘리자베스 페냐의 마지막 영화 중 한 편입니다. 명복을.
감독: Paul Weitz, 배우: Lily Tomlin, Julia Garner, Marcia Gay Harden, Judy Greer, Laverne Cox, Elizabeth Peña, Nat Wolff, Sarah Burns, John Cho, Sam Elliott
IMDb http://www.imdb.com/title/tt427051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3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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