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게된) 이야기

2015.04.29 02:08

inyosoul 조회 수:4126



일주일 쯤 후에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남편 될 사람은 16년 전쯤 PC 통신 시절에 채팅, 동호회 게시판 통해 알았고, 얼굴 모른 채로 통화 몇번 했던 친구입니다. 

그 긴 세월동안 간간히 메신저나 블로그 댓글로 안부 주고받았을 뿐, 이름도 얼굴도 몰랐어요. 알려고 하지도 않았구요.

그 친구는 제가 일기 블로그에 올린 일상 사진들 속에서 저렇게 생겼구나 저렇게 사는구나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해요.

그나마, 길에서 마주친다 해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희미한 이미지들이었어요.  전 그정도의 정보도 없었구요.

알고보니 그 사람은 2006년부터 2008년동안 제가 살았던 집에서 3분 정도 거리에 있는 건물로 출퇴근을 했더군요.

우리들의 집은 지금도 가깝지만, 2003년 이후, 쭉 가까웠어요. 지하철로 서너 정거장 떨어진 곳에 살다가

그 친구가 이사를 가서 지금은 차로 15분 정도 걸립니다. 그걸, 내내 몰랐어요. 


작년 초, 제 블로그에 거의 1년만에 남긴 그 사람 인사가 유난히 반가워서 제가 비밀댓글로 번호를 물어봤고, 통화를 했고,

일주일에 한번쯤은 통화를 하게 되었어요. 그 사람 사는 얘기를 듣고, 제 얘기를 하고, 과거의 사람들과 사건들을 같이 기억해내고

제가 그 사람 블로그의 일기들을 읽고 댓글을 달고.....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바쁘게 지내면서도 어쩐지 통화가 잦아졌어요. 시간이 훌쩍 흘러 5월쯤 되었을 때,  얼굴을 모른 채 너무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이건 아니지, 싶더군요. 우리 한번 만날까요?....가 아니라, 연락을 많이 줄이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어요. PC 통신 해보신 나이

좀 있는 분들은 아실거예요. PC통신 하다보면 전도연, 한석규의 "접속" 같은 상황에 흔히 처하곤 했으니까요. 물론 우리는

전도연 한석규가 아니고, 지금은 21세기..... 아무리 우리가 90년대를 좋아한다 한들, 2015년의 우리는 그런 순진한 꿈을 꾸기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달까요. 제 나이는 40대 중반, 이제 싱글 생활이 너무 익숙해져버렸고 결혼은 커녕 연애도 좀 어렵다 싶은

타이밍이었어요. 그런데 이 친구는,  우리 관계가 연애로 발전해야 마땅하며 심지어 결혼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세 달을 꼬박 고민하고, 8월 막바지에 얼굴을 봤습니다. 1999년에 처음 알았던, 내내 제 머리 속 이미지였던 꼬마가, 

마흔을 바라보는 남자와 오버랩되는 순간이었죠. 떨칠 수 없다는 확신에 얼굴을 본 것이기도 하지만,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바라보고 걷고 손을 잡고... 좋았어요. 그리고, 왜 이제 만났을까..하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아주 오래 알았던 사람이기도 하다는 건 참 묘하더군요. 서로의 일들과 성향을 깊이 알고 있지만 

정작 어떻게 걷는지 어떻게 웃는지 어떤 버릇이 있는지... 모든 건 새로웠구요. 그간 대개 텍스트로 소통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글과 말이 비주얼과 합해질 때, 퍼즐이 완성되는 느낌이 참 재미있었어요. 


이 친구와의 결혼을 결정하기까지는 만난 후 채 며칠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8개월쯤의 준비 과정도 

의외로 순탄한 편이었어요. 나이차이도 만만치 않았고, 상황이나 여러 모로 골치아픈 부분들이 있었는데, 늦은 결혼의 

장점이란 게 있더군요. 일단 집안 어른들께서 크게 관여하지 않으셨어요. 영영 안갈 줄 알았는데 간다고 하니 잘된 일이군,

하시며, 내내 관망하셨어요. 또 서로의 생활 기반이 다 잡혀있으니 어떻게 합치느냐 조율하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사실 제일 친한 친구 한둘 말곤 누구에게도 이런 걸 자세히 말하지 않았어요. 오래 친구였고, 어쩌다 이렇게 되었다 하고 말았죠.

이 게시판에 가입하고 드나든지 10년이 훌쩍 넘었고, 여전히 매일 들르며 정들어서인지, 아는 분 하나 없는 이 곳에

이런 글을 쓰고 있네요. 어쩌면 '그 사람'이 굉장히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답니다. 아마도 저는 이 말을 전하고 싶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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