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1 13:59
저는 과학의 'ㄱ'도 모르는 사람이라 일단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수준이하의 정도는 아니고 학교 때 과학 비교적 좋아하신 분, 심지어 과학의 '과' 정도의 관심은 지속하고 있으신 분이라도 많이 배우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내용들이 교과서에 실리기는커녕 지금까지의 교양 과학 도서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내용이 아니라고 하니까요. 이 점이 바로 이 책의 기획의 목적, 존재 목적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고 논외로 취급되었던 생물학계의 여러 연구 결과가 제위치를 찾도록, 편견에 도전하는 의미를 지닌 책이었어요.
그런 연구 결과들이 지은이의 주제 의식 아래 질서 있게 순서를 밟아서 정리, 통합되고 있습니다. 앞 문장처럼 쓰면 주제 의식이 앞서는 것 같지만 최근의 연구들이 가리키는 것이 잘 드러나도록 순서를 짜임새 있게 정리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런데 어떤 과학적 사실도 완전히 객관적인 눈으로 선택된 '객관적 지식'은 없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이 지적하는 중요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지금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여당 행태가 당장의 증거로 바로 떠오르네요.
이 책 분량의 거의 대부분은 기존의 암컷과 수컷에 대한 편견을 깨는 동물들의 성별 특징, 행동 양식을 보여 주고 그것을 연구한 연구자들의 증언을 찾아가서 확인하고 듣는 과정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암컷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던 것 - 새끼 돌보기 같은 것을 수컷이 담당하는 경우도 흔하고 수컷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던 것 - 적을 물리치는 일을 한다거나 무리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것이 암컷임을 확인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 앞서 본 성역할 뿐만이 아니라 성의 결정 자체도 개체의 평생에 고정된 것이 아니고 어느 성이라고 확정지을 수 없는 경우나 자웅이 한 몸인 개체도 나와요. 생물계가 암컷과 수컷으로 이분화된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사실 암수는 거의 대부분 신체상, 장기 기관상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잖아요. 성은 부분적인 것이며 그 결정은 자연적, 환경적, 사회적인 요인의 영향으로 유동적으로 결정된다는 증거들이 나옵니다. 처음 가지고 있던 성이 바뀌는 예는 신기하고 재미있더라고요.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로 익숙한 물고기인 흰동가리는 성전환을 한다고 합니다.(영화에는 물론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요) 영역을 사수하는 일은 암컷이 하고 알을 돌보는 것이 수컷인데 암컷이 사고사하면 수컷이 암컷으로 변신하여 근거지를 지키는 우두머리가 되고 이 암컷은 돌보던 어린 수컷이 성숙한 후에 짝을 이룬다고 해요. 상황에 따라 환경에 따라 뇌의 작용으로 성전환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성은 하나의 스펙트럼상에 존재하며 모든 성은 기본적으로 같은 유전자, 같은 호르몬, 같은 뇌의 산물임을 발견' 하였다고 저자는 쓰고 있습니다. 이성애를 중심으로 두고 기존의 암수 두 틀에 모든 생물 특성을 우겨 넣는 관점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객관적 지식'의 허울을 쓴 편견, 을 깨트리는 여러 동물들의 예를 접한 후 '편견 없는 자연계'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마지막 장에 이르면 약간의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성을 보는 관점이 어느정도 닫혀 있고 다양한 성적 정체성에 대해서 무지에 바탕한 막연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은 '다양성'을 근거 있는 가치로 확인시켜 주네요. 저자는 이 책의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이 희망의 경험이었다고 합니다. 눈으로 확인한 범고래, 보노보, 흰동가리들에서 영감과 힘을 얻기도 했지만 수십 년을 야외에서 연구하는 분을 비롯하여 편견에 도전하는 여러 여성 과학자들이 그 희망의 주 원인이라고 합니다. 마다가스카르, 호주, 하와이, 북태평양에 이르는 현지 답사와 팬데믹의 불안을 거쳐 완성된 이 책에는 저자의 엄청난 성의와 분투가 담겨 있었어요. 경이를 느끼게 합니다. 저는 워낙 이 책에서 다루는 분야에 아는 것이 없어서 풍부하게 읽지 못한 면도 있으리라 여깁니다. 다른 분들은 저보다 재미와 깊이를 더 찾으실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누구라도 재미있게 읽을 것 같습니다. 추천드립니다.
2023.07.11 14:17
2023.07.11 14:41
네, 이 책의 주된 재미가 바로 그 흔한 잘못된 상식을 깬다는 점입니다.
기존 연구 중에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데이터를 수집하거나 결과에 맞춰 가설을 수정하는 관행도 매우 많아(황우석처럼?) 편향성을 공고히 해왔기 때문에 다시 검증해야 할 연구가 아주 많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식으로 결과를 선별했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어쩌구저쩌구가 만능인 누가 떠올라요.
2023.07.11 19:55
2023.07.11 20:53
보노보가 그런 줄 몰랐어요. 다시 봤습니다. 우리는 침팬지가 아닌 보노보에 집중해야 합니다.
2023.07.11 22:10
아빠가 알 지키고 엄마가 나가서 벌어 오는 펭귄들 생각이 나네요. 그래서 딸래미가 자꾸 제 발 위에 올라가 앉고 그랬... (쿨럭;)
근데 이런 부분들은 어디까지나 특이한 사례들로 언급되며 그래서 더 강하게 기억에 남고 그랬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책인가봐요.
고전 문학들 읽으시다가 이제 자연 과학까지! 훌륭하십니다!! 라고 칭찬하며 제가 안 읽는 게으름을 정당화 해 봅니다. thoma님께서 다 읽어 주실 거야... 하하;
2023.07.11 23:05
맞습니다. 호르몬의 혼란이다, 어쩌다 생긴 변이다, 라고 하면서 그동안은 자세히 안 보고 특이한 사례로 남기려고 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양육이나 서식 환경, 적응력 등 여러 이유에서 성역할이 고정 관념을 벗어난 생물이 많았습니다. 이런 복잡하고 다양한 사례들을 드러내 주어서 시야가 넓어지는 거 같습니다.
문학 이외의 책도 쬐끔은 읽습니다만 읽고 나서 뭐라고 쓰긴 힘듭니다. 소설은 내가 이렇게 느꼈다는 데 어쩔건데(?) 식의 여분이 있는 글이라 생각하는데 다른 분야는 그게 어렵잖아요. 짧게 쓰는 글이라 이런 말도 우습지만요.
2023.07.12 10:31
다 읽으셨군요! 저는 그 때 이후로 진도가 안나가서 거미에서 멈춰있습니다ㅋ 그래도 계속 웃으면서 읽었습니다. 암수의 별의별 행태가 다 기록되어있어서 재미나게 보고 있습니다 ㅋㅋ작가님 말투가 꽤나 신랄해서 엄청 웃겨요 ㅋㅋ
2023.07.12 12:21
저도 중반까지는 이래저래 끊어 읽었는데 후반은 이어서 끝까지 달렸더니 느낌이 좋았어요.
작가가 투지와 유머를 겸비했죠. 야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부분이 많았습니다.ㅎ
고전적인 남녀의 성별과 성역할이 절대분별의 진리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흔히 내세우는 것이, 자연 및 동물 세계에서는 (인간세계와 같은) 혼란이 없다는 주장이라는 걸 생각하면 아주 흥미로운 책이군요. 저는 그들이 믿는 것처럼 동물 세계가 확고하게 나눠져 있더라도(그렇지 않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인간이 따라야 할 모범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과학만능주의자들이 이런 사실을 마주하면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면 키득키득 웃음부터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