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13 02:43
14. 소설가의 각오
조정래 작가의 <황홀한 글감옥> 감상을 듀게에 남겼더니 댓글로 추천받은 책. 22세에 쓴 첫 소설로 신인상과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후 일평생 시골에 박혀 오직 자신이 쓴 소설 인세로'만' 살아간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 모음집 되겠습니다.
책을 손에 들자마자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은 첫 문장이 "여자나 게이한테 인기가 있으면 끝장입니다. 그런 치들 덕분에 먹고산다고 생각하면 나는 죽고 싶어집니다."였던데다 그 근처 문장들은 더 대단해서, 잠시 이걸 읽어 말어 고민을 했지만,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습니다. 재미있었거든요. 저 문장에서도 보이듯,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특히 젊은 시절의 글은 부모에게 상처 입은 까칠하고 사회성이 부족하고 현대 사회에 불만이 굉장한 사람이 쓴 글이라는 게 보이지요. 하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사회의 눈이나 듣는 사람의 마음을 고려하여 그냥 좋게 넘어가거나, 훌륭한 필력을 무기로 혐오감을 점잖고 지적으로 표현하거나, 겉으로 보기엔 감각적이고 예술가적인 하지만 짜증과 혐오가 소금 배이듯 구석구석 배인 글로 빙 둘러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넘치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너 진짜 싫으니 꺼지라고 질러버리는 사람의 보고 있자니, 상당히 재미있더라고요. 더구나 그가 질러버리는 대상은 여자와 게이에 한정되지 않고 일본 소설가와 평론가, 출판사 편집자와 기자, 보통 셀러리맨과 돈 많은 한량, 소설의 독자와 자기 소설을 영화화한 제작진, 그리고 일본 영화와 소설에까지 두루 미치는데, 이런 전방위적 독설을 구경하는 재미가 상당했습니다. 역지사지는 던져버린 독선적인 말도 꽤 내뱉지만, 누가 좀 해줬으면 싶었던 속 시원한 소리도 아주 많이 하니까요.
더구나 이 분은 소설을 써서 받은 댓가로'만' 먹고 살겠다는 소설가의 각오 혹은 오기가 남다르고, 그 각오대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철저한 고독과 가난,그리고 수도자적인 단순한 삶을 견뎌내고 있지요. 그런 사람이 쓴 글이니 만치, 이 분의 글에는 신념을 위해 생활고 따위는 가볍게 견뎌내는 사람다운 강인함이 철철 넘칩니다. 음, 수도자적인 생활은 아니군요. 커다란 개 두마리를 끌고 온 산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뛰어다니니. 그냥 단순한 삶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소설가의 각오 말이죠. 이 각오가 먼저인지, 까칠한 성격이 먼저인지, 애매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소설가와 평단에 인간관계로 비비고 언론이나 대중에게 좋고 멋진 사람으로 어필하기 위해 알랑방귀 뀌지 않고 오직 소설로만 승부하겠다, 내 인생을 오직 소설에 걸겠다, 안 팔리면 안 팔리는 대로 그 한도 내에서 가난하게 살다 죽겠다는 식의 독한 각오가 먼저 선 후 낙향하여 가난과 고독을 견디며 소설에 몰두하게 된 것인지, 혹은 속이 잔뜩 꼬인데다 세상의 복마전을 보며 끓어오르는 혐오를 숨기지도 못하는 성미에 호의를 가지고 다가왔던 사람에게까지 성질 더러운 인간으로 찍혀버릴 정도로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인지라 자기 성격에 못 이겨 다 꼴 보기 싫으니 혼자 살겠다며 낙향하여 개와 산을 벗 삼으며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저런 독한 각오를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인지, 애매해요. 제 생각에는 후자 쪽인 것 같아요. 타고난 성격대로 살다 보니 그런 삶을 살게 된 것이죠. 그래도 일본의 유명 작가들처럼 떼돈을 벌지는 못하더라도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고(있는 거 맞죠? 아닌가?) 바다 건너 사는 소설치인 저까지 그의 책을 사서 읽을 정도로 성공한 소설가로 평생을 살며 세상의 존경을 받고 계시니, 성격이 운명을 결정하는 좋은 쪽의 사례 아닐까 싶습니다.
문장이 참 좋습니다. 더러운 성격을 숨기지 않는 작가의 독설이 종종 저에게도 (여자'따위'라서, 혹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질 만큼 강하지 못해서.) 쏟아지는 짜증을 참으면서도 책을 계속 읽었던 이유 중 하나도 그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이 분의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정련되어 있으며, 짧다면 꽤 짧은 편입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메세지의 핵심을 간결하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했던 전직 통신사 시절 단련된 기술이며, 동시에 군더더기가 붙은 것은 몸이든 글이든 도저히 참아내지 못하여 한번 쓴 글을 깎고 또 깎는 버릇이 들어버린 탓이라며 작가 본인이 책 속에서 밝히고 있지요. 그런 정련되고 간결하며 단단한 문장이 작가의 대단한 성격과 어우러져 쭉 흐르다 보니 그냥 계속 글을 읽어 나가게 되더군요. 소설가 데뷔 전 문학애호가이던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소설은 무시하고 일본 영화의 황금시대 작품들을 줄창 보며 '저 영화는 왜 재미있는가'를 분석하던 것이 취미던 영화애호가답게, 영상의 시대에, 대체 왜 영화나 TV 대신 소설이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답을 찾으셨다고 하는데, 문학에 문외한인 저는 이 분의 중편 소설을 하나 읽어보았지만 그게 뭔지 잘 모르겠더이다만, 하여튼 소설의 형식 뿐만 아니라 구사하는 문체에도 뭔가 그 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긴 150편이 넘는 소설을 썼다는데, 그 중 한 편 달랑 읽고 알 수 있겠니.
그렇게 이 분의 중편 하나를 달랑 읽고, 다른 중편은 손 대기 시작했을 뿐이지만, 일본 소설을 까고 또 까면서도 <백경>에 대한 애정은 수차례 고백하시는 모습도 그렇고, 작가가 '고독을 견디는 강인한 혹은 비참한 남자'에 필이 꽂힌 것 같다는 편견이 좀 생겼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정서를 꽤 좋아해서, 좋게 읽었습니다. 고독하면서도 어딘가 꼬인 남자라 하니 생각나는데, 이 분과 아버지의 관계도 재미있습니다. 이 책의 글은 1968년도부터 1991년도까지 2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있는데, 20대 초기, 생전 처음 쓴 소설이 덜컥 문학상을 수상한 언저리, 한참 젊을 때 쓴 글에는 부모 특히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부글부글 끓고 있어요. 그런데 나이가 꽤 든 후 쓴 글에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도 상당히 옅어졌고, 여전히 문학광팬인 아버지에게 '내가 쓴 게 더 재미있는데' 하며 은근 자기 소설을 권하지 않나, 나중에는 아버지 덕에 소설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글까지 쓸 정도가 되더군요.
하지만 제일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왜 나는 소설가가 되었는가?'하는 작가의 고민과 얽힌 신인상 수상 전후 장면입니다. 저 고민에 대한 대답은 주로 어렵사리 들어간 회사가 부도나기 직전인 상황에서 무슨 생각인지 직장에서 시간을 쪼개 난생처음 써내려간 소설이 아쿠타가와 상을 포함한 문학상 두 개를 휩쓸어버린 전후 상황을 묘사하며 '하다 보니 상황에 쓸려 소설가가 되었다'는 식으로 하게 되는데, 이 내용이 하도 반복되니 나중에는 '또 이거냐?' 싶더군요. 하지만 그만큼 작가 본인에게 중요한 화두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나는 소설을 쓰는가?'가 아니라, '왜 나는 소설가가 되기로 하였는가?'. 하지만 저 같은 일반인의 관심은 대체 어떻게 하면 생전 처음 쓴 소설이 그런 큰 상을 덜컥 탈 수 있는가에 쏠리게 마련이죠. 애초에 소설을 열심히 읽던 문학도였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소설 따위 나 몰라라 하던 사람이 그냥 한번 써볼까? 하며 쓴 첫 소설이 어째서 그런 수준으로 뽑혀 나온걸까요. 신기합니다.
이 책은 애초 도서관에서 빌려 왔습니다. 하지만 까칠한 작가 성격에 '뭐 이래?'하면서도 하룻밤 새 다 읽어 치운 후, 이건 소장하자 싶어 새 책으로 주문하였지요. 그리고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 버튼을 누르느라 리뷰나 관련 기사들을 읽다가, 이 책이 한때 문학애호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책 뒷표지에는 신경숙 소설가님의 감상문?추천서?까지 실려있더군요. 나름 유명한 책이었나 봅니다. 저 또한 즐겁게 읽었습니다. 책을 추천을 해주신 kinema1995님께 감사를.
15. 달에 울다
위의 책을 읽고 '에잇 그렇게 독하게 살며 쓴 소설이 대체 어떤데? 구경이나 좀 하자.' 싶어 산 책. 중편 소설 2개가 실려있습니다. '달에 울다'만 읽고, 뒤의 중편은 읽다 말았어요. 이것도 조만간 읽을 것 같고 이쪽이 더 제 취향일 확률이 높지만, 그러나 말거나 따로 감상은 안 쓰렵니다.
읽은 쪽 소설에 대해. 보통 소설을 읽고 나면 뭔가 허해지면서 '어쩐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편인데, 적어도 이런 허함은 없는 소설이었습니다. <달에 울다>는 시와 같은 문단들이 쭉 이어지는데, 그 속에 박힌 정련되고 깔끔한 단문들을 쭉 읽다 보면 어느새 아름답고 고독한, 그리고 조금은 슬픈 영상이 둥실 떠오릅니다. 이게 상당히 신기했어요. 정련된 단문들도 괜찮았고, 이게 만들어내는 감각적인 영상이나 서글프고 고독한 분위기도 꽤 좋았습니다. 그리고 사과나무니 사과밭이니 사과향이니 사과가 끊임없이 언급되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사과인지라, 꽤 좋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역시 작품 초에 등장하는 백구였습니다. 늠름하고 현명하고 고독한 인생의 쓸쓸한 동반자가 되는. 강아지를 애지중지 키우는 저는, 개가 이런 식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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