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 소설] 픽쳐걸

2012.12.19 00:17

liece 조회 수:2327

 

 

 “안녕하세요 박사님.”

 “난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아.”

 “박사님이라는 호칭 말씀이신가요?”

 “그리고 인사.”

 어쩐지 무례하지만 남자는 입술을 씰룩일 뿐 별다른 말 없이 그대로 서있었다. ‘박사’라고 칭해진, 주름이 지고 검버섯 퍼렇게 피어오른 노인은 누런 담배 연기를 뻑뻑 피어대다 연기와 더불어 말을 내었다.

 “어쩐 일이던가 잊혀진 이 유적에.”

 “유적이라곤 할 수 없습니다.”

 “한 대 필겐가?”

 “사양하겠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을 맺으며 어떤 리본을 그의 무릎에 놓았다. 붉고, 일련의 숫자가 새겨진 리본이었다. A-4345... 빛바래어 더 이상 읽는 건 무리였다.

 노인은 연기 너머로 그 리본을 보았다.


 

 


나는 이곳에 있다.


「qWen사 안드로이드 1기의 A-4345418i33」


 "팡!” 단말의 의성어와 함께 플래시가 터지고 어둠은 부서졌다. 그녀는 쿡쿡거리며 마지막 컷으로 꽉 채워진 필름을 꺼내고 옆을 더듬어 또 다른 필름을 끼워 넣었다. 그녀는 밀폐된 방안으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어둠에 앞서 잡아먹힌 ‘앞’ ‘뒤’ ‘아침’ ‘점심’ ‘저녁’ '새벽‘ ’약간의 기억‘ 등들과 닮은꼴이 될 것만 같다. 미치기 일보 직전의 그녀를 붙들어주는 것은 그 카메라뿐이었다. 카메라의 감촉, 셔터버튼을 누르는 감각, “팡!”터지는 플래시는 어둠을 가른다. 한 순간이나마 가르고 0.4초의 시간을 그녀에게 되돌려준다.

 간혹 의문이 들곤 했다. ‘빛’이라는 게 있었던가?

 ‘밖’이라는 게 있었던가?

  

 혹은 그 모든 건 허상이고, 난 사실 이 방의 일부이며 혹은 이 방의 어둠이 뭉쳐 생겨난 어떤 게 아니던가? 뇌와 눈과 코, 입, 목과 가슴과 배, 엉덩이, 다리, 허벅살, 손가락, 발가락... 이런 것들이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지?

 사실 난 이 카메라의 일부고, 내게는 손가락과 ‘팡!’하고 말을 하는 입만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 마다 그녀는 셔터를 눌렀다. 어째서인지 카메라의 배터리는 언제까지고 닳지 않는다. 그녀의 사지와 등과 배와 가슴엔 어떤 서늘한 감촉의 선같은 것들이 이어져있다. 그 외엔 오직 침묵과 어둠뿐, 그리고 카메라뿐.

 누가 날 이곳에 처넣었더라?

 언제부터 난 이곳에 있었던가…….

 난 무엇을 위한 것인가?

 때로 어떤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 흘러온다.

 주인의 남자아이에게 사탕을 주려고...  달콤한, 과일즙이 듬뿍 들어간...

 뺨 위로 식염수가 흐른다.



 

 


 

 

 

“그녀는 신형이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릴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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