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마 시절, 매일매일 집에서 먹는 음식은 지겨움 그 자체였습니다. 누가 내 소원이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첫번째도 외식, 두번째도 외식,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소원도 외식이라고 외쳤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고 집안 형편이 조금씩 피면서 짜장면도 제법 자주 먹을 수 있게 되고, 운수좋은 날에는 탕수육도 맛 볼 수 있었지만  외식에 대한 사랑은 눈꼽만치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범생이 고딩 시절이 지나고, 연애 하느라 공부는 뒷전이었던 질풍노도의 대학 시절이 지나고 바둑의 정석처럼 회사원이 되는 코스를 밟게 되었습니다. 집밥과 맨날 똑같은 메뉴만 자랑하는 학교 식당을 벗어나 회사 주변에서 마음껏 점심 외식을 즐길 수 있어서 회사 생활은 즐거웠지요. 당연하게도 "가정식 백반"이라는 걸 내세우는 밥집은 절대 출입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맨날 먹어 지겹기 그지없는 집밥을 밖에 나와서까지 먹으라고라고라고???


"Cancel"을 캔클이라고 읽는 직장 동료와 3년 노력끝에 토익 450점(토플 아닙니다)의 위업을 달성했다고 기쁨에 겨워 축하주로 낮술을 거나하게 드시는 과장님이 있는 회사에서 해외 사업을 시작하다보니 영어 좀 하게 생긴 얼굴이라는 이유로 외국과의 교신 및 해외 출장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아무리 봐도 된장 냄새만 풀풀 풍기는 얼굴인데, 어렸을 때 지게를 보며 A자를 익힌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고민도 잠깐, 출장가면 처음 보는 신기한 외국 음식들을 마음껏 먹으리라 꿈에 부풀었죠. 대머리 부장님을 모시고 간 첫 미국 출장. 길가에 보이는 식당들을 보면서 저기선 어떤 음식을 팔까 생각하느라 가슴 부풀어하는 저에게 떨어진 부장님의 첫 업무 명령은 "출장 기간 동안 식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 가까운 한국 식당을 찾아라"였습니다. 출장 기간 내내 하루 세번, 부장님을 모시고 왕복 두시간이 걸리는 한국 식당을 다니는 동안 제 가슴속은 피멍이 들었습니다.


신입사원 시절의 트라우마도 잠깐, 정신차려 보니 집을 떠나 여기저기 해외를 떠돌아다니며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신기하고 화려한 요리에 지치고, 마침내 가정식 백반이 그리고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지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든 건지, 철이 든 건지는 아니면 그저 향수병에 걸린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이라면 쟝죠지의 스테이크 코스 만찬을 때려치고 달려가 먹으리라 생각하게 되었죠. 왜 어릴때는 그걸 몰랐던 것일까요. 어머니 밥상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왜 그렇게 늦었을까요.


아주아주 오랜만에 출장을 가는 길에 한국을 잠시 들러가도록 일정을 잡았습니다. 어머니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어리광도 좀 부리고 그리고 어머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었죠.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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