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링턴] 속 연애편지

2021.10.22 10:25

어디로갈까 조회 수:570

E-mail 시대를 살면서 손편지를 받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습니다. 관공서에서 깍듯하게 대접하느라, 혹은 위엄을 갖추느라 우표 붙여 보내는 경우나 있을까 사적인 관계의 손편지를 받아본 건 아주 오랜만입니다. 어제 받았는데, 펼쳐 읽노라니 내용이 옛영화 속 연애편지 하나를 생각나게 해서 검색해봤어요. [캐링턴]에서 엠마 톰슨이 쓴 이 편지입니다.

- 사랑하는 리튼
하고싶은 말은 많지만 편지 쓸 기분은 아니에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알다시피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건 없었어요.
당신과 함께 한 긴 시간 동안 내 삶 속엔 당신밖에 없었죠. 결코 다른 사람은 없었어요.

굴욕감을 느낄 만큼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기다리노라니 외로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어요. 
당신이 올까 싶어 목을 빼고 창 밖을 몇 번이고 내다보죠. 
친구는 당신이 날 잃을까봐 불안해 하면서도 문학에 무지한 나를 오랫동안 곁에 두는 게 이상하다고 해요. 그 생각은 잘못된 거죠.

세상의 어느 누구도 문학과 당신의 글을 나만큼 사랑한 사람은 없을 거에요. 당신도 내 사랑이 얼마나 크고 절실한지 모를 거라 짐작해요. 
당신의 수염마저도 사랑했기에 당신을 떠올리면 눈물이 흘러서 편지를 읽을 수가 없군요. 언젠가 이런 말을 했었죠? 날 친구로서 사랑한다고.  
그 말을 다시 듣고 싶어요. 
                                   - 당신의 캐링턴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화가 캐링턴(엠마 톰슨)이 작가 리튼 스트래치(조나단 프라이스)와 기묘한 우정을 나누는 얘기입니다.
캐링턴은 명민하고 활달한 사람이지만 자신을 우정의 상대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동성애자 리튼의 존재가 힘들었겠죠. 그런데 사실 고백하지 않았을 뿐 리튼도 캐링턴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을 모르는 캐링턴은 일생을 통해 안타까워하며, 그 답답한 심정 때문에 때때로 리튼에게 저렇게 편지를 쓰곤 한 것이고요.

'나를 그토록 사랑하고 있는지 몰랐다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소. 내 곧 가리다.'
리튼의 이 말은 템포를 늦춰서 읽으면 저릿한 장면입니다. 무심한 척의 달인  블룸즈베리 그룹의 작가 그조차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았을 정도잖아요. 진심이 가닿을 때의 러브레터의 힘이란 부드럽고 순하지만, 사랑의 감정 그 광기보다 센 법이죠.

캐링턴의  "당신의 수염마저도 사랑했기에 당신을 떠올리면 눈물이 흘러 글을 읽을 수가 없어요." 라는 고백은 임팩트가 있어요. 그토록 싫어했던 리튼의 수염, 그래서 밤에 몰래 침입해서 자르려고까지 했던 수염인데,  한 사람의 존재를 받아들이자 그 싫었던 것조차 사랑하게 된 것이니까요.
캐링턴과 리튼은 20세기초의 예술가들로서 자유와 아름다움의 가치 추구, 무의미한 쾌락들과 편견의 타파를 위해 노력했죠. 어쩌면 본능과 자신의 의지에 충실했기에 한 시대의 편견과 오류들을 거부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 거부는 시대를 깊이 느끼고 인식한다는 점에서 곧 사랑이죠.
얼음 위에 바늘을 꽂은 듯이 미세한 균열처럼 생겨나는 사랑의 상처조차 받아들인다는 열린 감정인 거고요.

이 영화는 영국의 푸른 자연 그 아름다운  화면 위로 마이클 니만의 음악이 흐르죠. 맹목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진실을 느끼게 하려는 듯이 말이에요. 한번은 따라다니는 집요한 상대 때문에 캐링턴이 괴로워하는 상황일 때가 있었죠. 그때 리튼은 캐링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같이 살면 안되는 법이오. 필연적으로 한 사람이 떠나든가 미쳐버리고 말거든. "

메일 시대에 손편지를 쓸 정도의 마음 혹은 거리를 유지하려면,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할까요? 짝사랑이든 연애든 상대를 많이 좋아한다든가 더 빨리 좋아한다든가의  차이는 의외로 중요합니다. 그 정도와 속도의 차이 때문에 절제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도 감정이란 무작정 흘러가는 측면이 있는 것이고요. 설명하기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정작 리튼은 그 이유를 모르는지 캐링턴에게 가끔 반문하죠.
" 창작의 고통에서 하루라도 벗어나고 싶어. 그런데 나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지?"

캐링턴은 편지쓰기가 좋아서 편지를 쓰는 것만은 아닌 전문 화가죠. 표현의지를 단지 캔버스에게만 허용할 수 없어 언어로 옮겨놓는 그녀에게 무뚝뚝한 애정과 다정한 포즈를 취하는 리튼도 가끔은 그녀에게 그 같은 고민을 털어놓아요.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철인은 아니니까요.

리튼/  어떤 사람들은 재미로 글을 쓴다던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책 한 권을 끝내고나면, 회의가 밀려오곤 해.
캐링턴/ 이후에 올 세상을 생각해봐요. 회의가 어때서요? 내가 왜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음. 오늘 누군가에게 메일을 보낼 계획이 있는 분들은 손편지를 함 써보세요. 
그/그녀에게 편지쓰는 낮시간, 나무마다 아직 가득 물 올라 있는 모습을 따라서 멈추지않은 감정이 춤춥니다. 굉장한 무엇을 받는 것보다 그 느낌이 의외로 의지가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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