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워서 글을 나중에 삭제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회사로 이직한 지는 6개월쯤 됩니다. 쉬는 기간 없는 이직이었고요.


10시 출근 7시 퇴근이 비교적 정확히 지켜지고, 비상식적인 사람 없고, 컴퓨터도 최고로 좋은 걸 쓰고 있고, 통근도 1시간 정도로 먼저 다니던 회사에 비해 훨씬 가깝습니다.

돈 걱정할 필요 없고, 이 계열의 작은 업체로는 드물게 하청을 하는 회사도 아니라 미친 듯한 스케쥴의 압박도 없고요.

회식도 자주 안 하고, 회식 때 술을 강요하는 법도 없습니다.

이 업계에서 퇴근 후에 정기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사치일 지도 모릅니다. 먼저 회사 다닐 때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죠. 새벽 너덧시에 퇴근해서 "아가씨가.. 쯔쯔." 하는 택시기사님들의 불쌍한 눈초리를 받을 때도 많았으니까요.

이직하면서 연봉이 오르진 않았지만(사실상 급여액이 좀 줄긴 했습니다만 ㅎㅎ)제 경력이나 회사 규모에 비해 연봉이 적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그런데도!! 전 내일 그만둔다고 말할까, 말까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스스로 좀 패배자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구성원은 회사의 오너이신 두 분과, 그 분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저, 그리고 그밖의 지원 업무를 하고 있는 분 그렇게 네 사람입니다.

그리고 회사의 오너이신 두 분은 생활도 같이 하는 사이이고요.


동료라 할 만한 사람 없이 윗분 두분만 모시고 일 해야 한다는 거, 생각보다 만만치 않더라구요.

일단 저와 포지션이 겹치는 한 분의 그림에 겨우 따라가고 있자면, 다른 분이 오, 이건 안돼! 라고 하실 때가 꽤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다시... 가 되고요.

사실 그 한 분의 그림에 따라가는 것도 굉장히 벅찬 일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일해왔던 것과 전혀 다른 스타일에, 우주적인 퀄리티를 요구하시거든요.

거의 본인이 하는 것과 비슷하거나 뛰어넘는 수준을 원하시는데, 나이나 경력차가 확연한데 그게 됩니까.ㅠㅠ

처음에는 좀 벅차도 열심히 따라가면 되겠지, 생각했는데(그 생각으로 6개월을 버텨온 것이고요) 그런 문화를 베이스로 갖고 있지 않은 제가 만들어내는 건 전혀 어설픈 흉내가 될 뿐이고, 요구사항을 수용하기만 하다 보면 이미 제가 결과물을 컨트롤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립니다. 좋은 말로 조금 더 다듬자고 하시지만, 곰곰이 씹어 보면 일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것이지요.


제 이야기를 해 보기도 하지만, 잘 들어주신 후.. 아무튼,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아. 일단 이렇게 해요. 가 되어버립니다.

제 입장에서는 함께 프로젝트를 한다기보다는, 두 분을 갑으로 모시고 하청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동안의 갑님들처럼 요구사항을 무례하게 쏟아내지는 않지만요.


그리고 아무래도 생활을 같이 하시는 분들이고 생활도 일의 연장일 정도라서, 저 모르는 사이에 생기는 변경사항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기획에 대해 문서로 만들어지는 부분이 전혀 없어서 두 분은 유연하게 합을 맞춰가며 일할 수 있지만,

일개 직원인 저로서는 장님이 코끼리 만져가며 코끼리 코디해야 하는 수준입니다.

일하는 시간에는 별 회의나 말 없이 서로 작업만 하고 있지만, 제가 없는 시간에 결정되는 부분이 많아 보이고 업무 외 두 분이 생활하며 일할 때의 진척도가 더 높아 보입니다.

제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이야기를 시도해 보아도 입장과 힘의 차이만 확연히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많이 답답한데, 이걸 토로할 사람이 없는 것도 답답하고... 

다른 직원분은 저와 일하는 영역이 전혀 다르고, 일에도 초보자라 제가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한 마디도 못했고요.

심지어 사무실이 답답하거나 일하기 좀 싫을 때 밖에 나가서 차라도 한잔 해요, 라고 할 사람도 없어 많이 외롭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오너님께 어리광을 피울 수는 없잖아요. 직원과는 일을 대하는 온도 자체가 다른데. 본인들의 일이라 일 할 때도 직원인 제가 민망할 정도로 굉장히 치열하십니다.

전에는 저도 일 과하게 열심히 하는 직원에 속했는데, 도저히 그 에너지를 따라갈 수가 없어요.

확실히 동료가 없다는 건 무척 외로운 일이예요. 오너 두분의 팀웍과 결속력에 대비되어 더욱더요.


이렇게 지내다보니 일할 때 에너지와 의욕이 굉장히 부족하게 되고, 제가 하는 일이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데 갈수록 마른 수건을 억지로 짜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자꾸 제가 잉여인력 같고요. 제가 만드는 결과물이 갈수록 제가 보기에도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그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느낀 게 지난 금요일이었지요.

난생 처음으로 일이 손에 안잡혀서 3시간이나 일 하는 척 빈둥빈둥했는데 회사에서 일을 안 한다는게 그렇게 괴로운 일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 처음으로 아, 좀 쉬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집에서 쉬기에도 무척 여의치 않은 상황이예요. 3년동안 모아놓은 돈은 조금 있지만, 졸업을 앞두고 구직하는 동생과, 최근 정년퇴직하고 실업급여 타고 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집에 몇달 눌러앉는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미안한 일입니다. 

남자친구는 데이트 비용이고 가족이고 사장님에 대한 미안함이고 전혀 생각하지 말고 너무 힘들면 그만두고 멀리 여행이라도 갔다와라 하는데,

막상 저는 내일 어떤 말을 꺼내야 할 지조차 모르겠네요.


마음이 너무 복잡합니다.

이런 철없는 저를 매우 쳐주세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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