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망각.

2023.07.20 15:38

잔인한오후 조회 수:434

독서 섭취론을 통해 간간히 읽었던 것들 일부를 잊어버리는 상황을 외면해왔는데, 요새 들어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은 경험을 했습니다. (독서 섭취론이란, 마치 우리가 매일의 먹는 음식의 종류와 맛을 일일히 기억하지 못 하지만, 결국 우리 몸을 이루는 일부가 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남기는 것 없이 책 읽는 죄책감을 완화시켜주는 관점입니다.)


삼 주에 두 번 일요일마다 각각 다섯 권의 책을 빌리는 도서관이 2곳 있고, 그래서 총 열 권의 책을 저글링 하듯이 읽는 척 하는게 근 반 년된 제 루틴인데, ( 그 전까지는 한 곳에서만 빌렸음 ) 당연히 평균 대략 한 달에 열 권을 읽을 수 없으니 대부분 표지만 빨아먹고는 다시 반납하는게 일상입니다. 대출하신 분들은 아무래도 공감하실, 반납 직전에 어떻게든 한 두 장이라도 읽어보려고 하다 장렬히 실패하는게 일상일 것이며 저도 마찬가지로 지난 주 토요일에 그렇게 반납할 책들을 하나 하나 보다가 소소한 충격을 느꼈습니다. 빌린 직후의 제가 장하게도, 모든 책의 앞 부분을 조금이라도 읽고 책 날개를 끼워놓거나 굴러다니는 종이를 책갈피 삼아 - 최근에는 더 이상 구매하지 않고 영화표나 입장권 등으로 갈음하는 편입니다 - 표시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권 모두…… 그 부분까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겁니다? 앞 뒤 맥락을 탈탈 털어서 서문 등을 보면 작은 단어 하나, 어떤 문장 하나라도 기억이 날만도 한데 그렇게 표시 해놓았다는 사실 자체도 기억이 안 났습니다.


한 때, 어떤 모임에서 그 주에 빌리는 책들 목록을 꾸준히 올려본 적이 있었는데 하다가 흐지부지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일이 굉장히 바빠져서 그런 소소한 기록을 하기엔 힘이 없기도 했지만, 안 읽고 반납 하는 책들이 너무 많아 창피했기 때문인 것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그 이후, 도서관에서 빌리는건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서관의 신간 도서를 구경하고, 책을 빌리는 일 자체"가 내 취미 생활이라는 관점 변환을 했거든요. 어쩌다 빌린 책 중에 상황에 맞아 다 읽으면 이득이고요. 아니면 각각의 서문 정도만 읽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독서 섭취론에 비견하면 현재는... 제로 칼로리 음식을 열심히 먹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그럼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 것입니다. 전에는 그래도 읽고 나면 살은 다 버릴지언정 뼈라도 남았는데, 이제는 뼈도 못 추리는 상황이 되다니.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떠오르는건, 제로 슈거 제로 카페인 콜라인데요. 굳이 그걸 마시는 것과 탄산수를 마시는 건 무슨 차이냐, 색소만 포함이 아닌가 생각이 들면서도, 좀 더 감각적으로 그냥 책 읽는 그 순간을 즐긴다고 생각할까 싶군요. 최근 들어서는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그 자체가 강박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고요. (애인이 영화 다시 보면 전혀 생각이 안 나서 다시 보는 것보다 새로 보는 것처럼 재미있다고 하는데, 그런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할지도? 저는 아직(?) 영화는 골격을 기억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현 직장을 다니면서 뇌의 스위치를 바꾸는 법을 완전히 체화했거든요. 회사에서 나가는 즉시 회사 일에 대한 기억을 꺼버릴 수 있게 되어서, 휴일 동안은 회사 스트레스로부터 온전히 단절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 직장에서는 딱히 주말이나 일과후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거든요. 아침에 출근하면 대략 3 ~ 5분 동안 해야 할 일들의 구성을 불러오는 부팅 시간이 필요하게 되긴 했지만 (그리고 근무시간이 아닐 때 혹시라도 연락 오면 이 전보다 훨씬 더 스트레스 받긴 하지만) 근무 누적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는 꽤 안전하게 벗어난 편인듯 합니다. 혹시 이런 기억 파묻기가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작동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는군요.


원체 무언가를 꼼꼼하고 자세하게 기억하는 것에는 쥐약이어서 오개념으로 기억하는 상황이 많았는데, 인터넷으로 매 번 교차확인을 하는 버릇을 들였더니 머리 속에서 더 새어나가더군요. 그래도 읽은지 얼마 안 된 책의 몇 가지 개념들은 꽤 기억하는 편이었는데 이렇게 되어가니 씁쓸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나 싶습니다. (명사나 형용사, 동사가 하나씩 잘 기억 안 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나이 먹지도 않았는데 이게 맞나요? ㅋㅋ)


다들 어쩌신가 싶어 글을 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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