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25 00:28
브랫 앤더슨과 각본가 안소니 자스윈스키가 [베니싱]의 모델로 삼았던 건 로아노크 식민지에서 일어났던 알 수 없는 실종사건입니다. 식민지의 리더였던 존 화이트가 물자를 구하러 영국에 갔다가 돌아와보니 섬에 살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는데, 유일한 단서는 나무에 남겨진 '크로아토안'이라는 정체불명의 이름 뿐이었다죠. 그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해 시체로 발견되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렇게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뜻을 알 수 없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증발되었으니, 후대 사람들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미쳐버리는 거죠. 분명 해답은 사람들의 상상보다 시시하겠지만요.
영화가 그리는 사건은 로아노크 식민지 실종사건보다 훨씬 대규모입니다. 어느 날 디트로이트에 대규모의 정전사건이 발생하는데, 그만 잠시 어둠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옷과 신발을 남긴 채 증발해버립니다. 남은 생존자들이 증발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어떻게든 빛 속에 남아 있는 것뿐. 하지만 낮은 점점 짧아지고 배터리와 발전기는 말을 듣지 않으며 주변의 어둠 속에서는 그들을 끌고 가려는 검은 귀신들의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방송기자, 영화관 영사기사, 물리치료사, 엄마를 잃은 소년으로 구성된 네 주인공들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소멸되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고, 그 과정 중 그들은 견디기 힘든 공포와 맞서게 됩니다.
이 아이디어는 괜찮습니다. 독창적이진 않아요. 바로 몇 년 전만 해도 어둠의 공포를 내세우는 저예산 호러가 여러 편 나왔으니까요. 하지만 앤더슨은 이 아이디어를 보다 풍요롭게 다루고 있습니다. 단순히 어둠만 보여주는 대신, 어둠과 빛의 종류를 섬세하게 나누고 다양한 변주를 주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인용도 잘 다루고 있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도 예상 외로 많아요. 무엇보다 설정의 힘이 셉니다. 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밤만 견딘다고 이기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그들이 발버둥을 쳐도 언젠가 어둠이 그들 모두를 집어삼키는 건 시간문제처럼 보이니까요. 오싹합니다.
단지 좀 나이브해보이긴 합니다. 귀신들, 존재의 소멸에 대한 공포와 같은 건 지나치게 직설적이죠. '크로아토안'이라는 단어 사용도 너무 뻔한 구석이 있고. 그리고 주인공들이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괜히 하며 스스로를 망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들은 같은 상황에서 훨씬 안락하게 지낼 수 있어요. 배터리나 발전기를 믿을 수 없다면 촛불을 켜놓고 얌전히 앉아만 있어도 되는 겁니다. 하긴 정말 그랬다면 영화로 만들 이야기도 없어졌겠죠? (11/03/25)
★★☆
기타등등
1. Vanishing을 베니싱이라고 쓰는 이유는 도대체 뭐랍니까.
2. 그런데 옷과 신발만 남겨놓고 몸만 사라진다는 아이디어는 괴상하지 않습니까? 사라지기 직전에 물을 한 잔 마시면 그 물은 우리 몸인가요? 위 속에 들어 있는 팝콘은요? 배설물은요? 굳은 살은? 눈물은? 이마에서 흐른 땀은? 위액은? 대장균은? 미토콘드리아는? 메이크업은? 휴거 믿는 기독교 광신자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대요?
감독: Brad Anderson, 출연: Hayden Christensen, John Leguizamo, Thandie Newton, Jacob Latimore, Taylor Groothuis
IMDb http://www.imdb.com/title/tt1452628/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58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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