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사귀다

2021.04.25 11:54

어디로갈까 조회 수:609

어제는 간만에 부모님과 북악하늘길을 올랐습니다. 부암동 일대를 답사한 후 백석동에서 시작한 산행이었어요. 마스크를 쓴 갑갑한 상태에서도 대화를 많이 나눴는데, 우리의 얘기는 '인왕제색도'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겸재 정선이 비가 내린 뒤의 인왕산을 그린 대표작이죠. 우리나라 진경 산수화 중 으뜸으로 꼽히는 그림입니다

백석동은 북악의 바위가 흰 돌이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제색'은 구름이 걷힐 때의 밝음과 개운함과는 달리 실제로는 바위들이 검은색인 경우가 잦습니다.  아버지의 설명으로는, 원래 흰빛의 밝은 바위인데 날이 흐리거나 비가 내리면 돌의 표면 질감이 짙어지기 때문이라더군요. ('현'하고 '현'하니 검다) 물기가 걷히기 직전의 바위는 그 암석의 물질파가 생명적 정감으로 내부의 유출이 일어나는 정경 같은 것이라나요. 그 말씀은 마치 "대리석 타일은 물고기가 가득찬 연못 같다'라고 한 들뢰즈의 뉘앙스를 연상시켰습니다. 

이 인용구의 물고기는 보르헤스적이기도 합니다.  보르헤스가 어느 산문에서 인용한 중국의 전설에는 황제의 군대와 치우의 군대가 싸우고, 동물들은 모두 치우군에 붙었습니다. 이윽고 황제군의 승리로 끝나자 황제는 거울 속에 동물들을 모두 가둬버렸고요. 미래의 어느 날, 거울이 깨어지는 운동이 일어난다는 예언이 전해져오는데, 그 운동의 주체가 다름아닌 물고기라는 것입니다. 검은 색감이 물고기의 이런저런 요동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고요. 그런데 겸재가 친구 이병연에게 <인왕제색도>를 그려주자 얼마 후 그 친구는 죽었다는군요. 이 사건 때문에 '인왕제색'의 의미는 여러 관점으로 갈리고 있다고 합니다. 

십년 전만 해도 청와대 경비초소와 붙어 있는 창의문에서는 신분증을 제시해야 했는데, 어인 일인지 어제 그런 검문은 없었고 창대한 뷰는 단 30초 안에 끝났습니다. 여전히 사진촬영은 금지였고, '청와대에서 CCTV로 지켜보고 있다'는 강압적인 안내말은 같았습니다. (대체 누가 누구를 위하여 지켜본다는 것일까요? - -) 주체 없는 공간이 비어 있지 않다는 건 신기한 강변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고 거기에 어떤 거짓이 깃들어 있다는 건 저의 느낌적 느낌입니다.
창의문도 조선 도성의 주요한 사소문답게 문 주변의 성곽을 견고하게 쌓아올린 형태입니다. 넓은 면이 아니라 좁은 면으로 그 밑변을 길게 쌓아올리는 축조 방식은 올라가는 동안 비스듬한 곡선의 궤적을 보이죠. 기어오르기 쉽지 않되, 이쪽 편에서 쉽게 방어할 수 있는 곡선인 거죠.

- 아버진 저보다 세계 많은 곳을 다녀보셨잖아요. 이처럼 정면 앞까지 쑥 들어오는 암산이 있는 도시가 있던가요?  산 위로 휘감고 돌아가는 변곡의 성곽이 있는 곳 말이에요.
" 서울 같은 도시는 못봤다. 내가 미처 못 가본 동독이나 동유럽의 옛도시에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 독일 작센 주에는 서울과 비슷한 곳이 있더군요. 이런 산성의 곡선적 궤적은 아니지지만요. 여기 산성 보세요. 도시를 휘갑치기 하던 도성이 어느덧 산으로 올라가고 산정에서 한번 회돌이치면서 다시 능선으로 향하잖아요. 대체 누가 디자인한 걸까요. 베르나르 카슈가 와서 봤으면 감탄했을 거에요."
" 이제야 말이다만 나는 동유럽의 카르파티아 산맥을 너희들과 걸어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단다. 코로나 세상이 와서 이젠 실현하기 요원한 꿈이 되었다만. "
- 그 산맥을 다룬 소설들이 있으니 같이 읽어보며 아쉬움을 달래보죠 뭐. 가령 성과 자연 사이의 교섭을 인상깊게 그려낸  쥘 베른의 <카르파티아 성> 같은 소설이요. 뭣보다 오래 건강하셔서 우리와 그 로망을 꼭 이뤄보도록 하시고요.

창의문 옛길 근처 산모퉁이 어느 카페에서 마신 커피 한 잔은 호텔 커피숍의 것과는 비견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맥락의 맛이었습니다. 부모님과의 산행은 혼자서 또는 연인과 동반하는 것과 다른 장구한 시간의 강물의 흐름과 주름을 재현하게 해줬습니다. 
하산하면서 가방에 넣어간 맥주를 나눠 마시며 아래세상을 내려다 보노라니 브뤼예르의 유명한 말이 떠오르더군요.
"삶은 살면서 느끼는 이에게는 비극이고 멀리서 바라보며 생각하는 이에겐 희극이다."

덧: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떠오른 시, 같이 읽어보아요`
-정상 부근 /이영광

눈 녹는 자리,
흰 눈보다 검은 흙이 더
선명하다
바탕색이다
아는 나무도 있고
모르는 나무는 셀 수도 없는
헐떡이는 산길을 올라
몸 없어 헤매는 바람 몇 점을 놓친다
휩쓸린 등뼈의 잡풀들,
제 한 몸 가누는 일로 평생을 나부껴온
헐벗은 자세들이 여기 서식한다
누구나 찾지만 모두가 버리는
폐허에서 보면,
수묵으로 저무는 영동 산간
내란 같은 발밑의 굴뚝 연기들, 그리고
짐승 꼬리처럼 숲으로 말려들어간 길
의혹 없는 생이 어디 있으랴만
사라진 길은 사라진 길이다
저 아찔한 내리막 도처에서
무수한 나무들이 꽃과 잎을 피워
다시 하릴없이 미쳐가도,
내가 아는 몇 그루는 꿈쩍도 않고
봄 깊은 날, 검게 그을린 채
끝내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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