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드라마 같은 데에서 자주 나오지요. 임금이 백성들이 사는 모습이 어떤지 궁금해서 용포를 벗고 보통 옷을 입고 민가를 몰래몰래 돌아다니는 거. 이런 걸 잠행(潛行)이라고 합니다. (잠행이란 건 임금님에게만 쓰는 건 아니고, 높은 관리나 암행어사가 탐문하러 다닐 때 두루 쓰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임금으로 태어나 호강하며 사는 것 같아도 평생 왕궁에서 살며 마음대로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니 굉장히 갑갑했을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짜릿했겠어요. 사람들이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도 꽤 즐거웠을테고 평범한 사람들 틈에 섞여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재미도 있었겠죠.

 

우리나라 잠행의 선구자라고 하면 아무래도 성종이려나요.
야사들이 워낙 많아서요. 글공부만 하는 가난한 선비를 보고 과거에 합격하게 힘을 써준다거나, 순박한 숯장수를 만나 선물을 내려다준다거나. 가끔 어우동과 만나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는 뜬소문까지. 하지만 이런 것들은 야사이고, 정말로 잠행을 많이 다녀서 기록이 남은 것은 그의 아들 연산군입니다.
말 그대로 미복 - 평상복을 입고 야밤의 한양을 돌아다녔드랬지요.

그렇게 경회루에 가서 한밤중에 촛불 천 개를 켜고 광란의 파-뤼 투나잇을 보내어 한양 백성들의 수면에 지대한 장애를 초래하기도 했고 임사홍 집에 놀러갔다가 그, 사단을 내게 된 피 묻은 적삼을 받아왔다는 야그도 있지요.

 

이렇듯 즐겁고 씽나는 잠행이었지만, 미처 높으신 분을 몰라본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할 위험도 있었습니다.

중종 때의 일입니다. 경상도에 서돌쇠라는 사람이 살았지요. 그는 포작, 그러니까 지붕을 잇는 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1539년 즈음, 돌쇠는 배를 타고 가다가 같은 배에 탄 어떤 낡은 옷을 입은 사람과 싸움이 붙었습니다. 그냥 말로 싸워도 될 게 몸싸움으로 번졌지요. 그 사람에게 불운하지만, 돌쇠는 싸움에는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무거운 목재를 들어올리고 이어오는 일에 이골이 난 튼튼한 팔로 한 대 쥐어박고, 두 대 쥐어박았습니다. 상대방은 속수무책으로 비오는 날에 먼지가 풀풀 날리도록 우닥투닥 맞았습니다. 가끔 "내가 여기 만호(지휘관)인데, 만호인데!" 소리가 나오긴 했습니다만, 돌쇠는 "니가 만호면 나는 전라좌수사다, 어디서 그딴 뻥을 까냐?" 하고 대꾸하며 한 대 때릴 걸 두 대 더 때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배에 타고 있던 병사 한 사람이 쥐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지요.

 

"저겨... 저 사람, 만호 어르신 맞는디요..."

 

그렇습니다. 돌쇠가 때리고 있던 것은 요즘의 경상도 통영 근처인 사량의 만호 박원충이었습니다. 이 일대를 정찰하기 위해 일부러 낡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던 거지요.
그걸 알게 된 돌쇠는 당장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어이쿠 만호 어르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싹싹 비는 대신.
솥뚜껑 같은 주먹을 꼭 쥐고 만호를 더 두들겨 팼습니다.

이리 퍽 패고 저리 퍽 패고, 그런 뒤 호쾌하게 배까지 가라앉혀버립니다. 말 그대로 증거인멸을 한 셈이지요. 그런 이후로 산으로 도망가서 숨어지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잔뜩 얻어터지고 물에까지 빠진 박원충(朴元忠)이었습니다만... 어찌어찌 용케 목숨은 건진 모양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소식은 임금님 귀에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중종은 어떻게 나라의 관리를 백성이 두들겨 팰 수 있냐면서 당장 체포해오게 합니다.

끈질긴 수색이 이어졌고, 산에 숨어있던 서돌석은 체포됩니다. 중종은 돌쇠의 죄가 너무 괘씸하다며 큰 벌을 내리도록 하는데... 이유인 즉슨, 원래 변방(경상도입니다...)의 백성들이 사납고 나라를 존중하지 않는데다가, 장수들의 체면이 형편이 없어진다 이거죠.

 

한 마디로 돌쇠잡아 군기 잡겠다는 이야기인데, 정승들이 뜯어말렸습니다.

 

"임금님, 돌쇠가 잘못하긴 했죠. 헌데 이런 일이 생기면 당장 보고를 했어야 했는데 박원충이 데꿀멍하고 있었던 걸로 봐서 지가 뭐 켕기는 게 있겠죠..."

 

그러면서 돌쇠를 당장 처형하는 대신 사건의 내막을 착실히 조사하자고 권했고, 중종도 화를 접고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명합니다.

사실, 나라의 관리가 일개 백성에게 떡이 되도록 얻어터진 건 참 모양새도 안 좋고 체면도 아니올씨다 한 일이지요. 문관이 그런다 해도 쪽팔릴 일일텐데 하물며 무관이 그랬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정승들이 말한 것도 그런 게 박원충이란 사람은 이전부터 행실이 나쁘고 마음씀이 모질어서 여기 저기서 사고치고 안 좋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아마 박원충이 돌쇠에게 두들겨 맞은 것도 "내가 만호인데, 넌 뭐야?" 이라는 식으로 속을 닦닦 긁어대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또 그 다음 관등성명이 밝혀진 이후에도 더 맞은 것도 "내가 널 가만 안 두겠다"는 식으로 지롤링을 떨어서 그렇게 됬겠지요. 돌쇠로서는 이판 사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겠다 싶어 배를 침몰시키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했겠지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법, 안 봐도 블루레이 아니겠습니까.
정승들의 식견이 탁월한 게, 그렇게 멍멍이 망신을 당하고도 박원충이 조용히 입닫고 있었던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란 말이죠. 뭐 백성에게 얻어터진게 쪽팔려서일 수도 있겠지만요.

이후 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돌쇠는 어떻게든 벌을 받았을 거여요. 나라의 관리를 두들겨 팬대다가 배까지 가라앉히고 체포 명령에도 저항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박원충 역시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알 수 없습니다. 일개 포작한에게 얻어터질 정도로 미약한 조선 해군의 아이콘이 되어버린지라 출세는 어려웠겠고... 그 이전에 사람 됨됨이가 글러먹었으니까요.

 

박원충과는 정반대로, 이런 사람도 있었습니다. 세종 때 우의정을 도맡았던 맹사성이란 어르신이 있지요. 어떻게 보면 참 특이한 분인데, 내가 잘나고 니는 못났네 하는 깔대기와 토론, 특정분야 덕후들이 시끌시끌 북적대던 세종의 궁궐에서 그는 언제나 평화롭고 고즈넉한 - 꽃향기를 사랑한 황소였답니다. 해서 그가 주로 하는 일이란 임금님과 신하들 싸움 말리기, 김종서를 못 살게 갈구는 황희 말리기, 그 외에 검은 소를 타고 닐리리 피리를 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맹사성은 어찌어찌 휴가를 받아 고향인 온양에 내려가기로 했댑니다. 이 빅뉴스를 접수한 지방의 수령들은 하늘 같으신 우의정님 한 번 뵙고 얼굴 도장 꽈아악 찍겠다는 일념으로 우르르 몰려갔댑니다.
그런데 하루 죙일 기다려도 정승님은 커녕 사또 한 사람 지나가지 않더랩니다. 웬 머리 허옇고 꾀죄죄한 노인네가 검은 소 타고 가며 피리 불고 지나가긴 했지만... 해가 뉘엿뉘엿 지도록 정승님은 오지 않았다나요.

 

이 이야기는 그냥 맹사성의 소박한 품성을 일러주는 일화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웬걸요. 그럴리가 있나요. 제복 쫙 차려입고 하인들 벌여놓고 잔치상까지도 옵션으로 끼워놓은 채 일렬 종대로 늘어서 있는 관리들을 보고 쟤들이 뭐하러 와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빡세디 빡센 조정 한 복판에서 우의정 노릇 못 하지요.

그러니까 언제 오매불망 우의정님하가 오실까 또르륵 또르륵 눈동자 굴리고 있는 인파들 앞을 천천히 지나쳐간 맹사성의 입가는 귀끝에 걸려있고 "모든 것은 계획대로"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요. 그는 꽃을 사랑하되 겉처럼 속도 까아만 황소였나 봅니다.

 

어느 도지사님이 저지른 사건이 난리네요.
...하고 싶은 말 많은데 그냥 넘기도록 하죠. 많이들 이야기하실테니까.
그런데 박원충과 맹사성 중에서 누가 더 멋져 보이나요? 전 아무래도 후자 같은데 말이죠.

 

p.s : 여행 다녀왔습니다. 절라 피곤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 세상에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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