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같은 요지의 글을 하나 썼는데 걍 묻혔습니다만... 반전으로 뒷통수를 치는 영화들은 늘 고민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뭔가 숨겨야 하는데, 자꾸 숨기기만 하자니 관객들은 그냥 흥미 자체를 잃어버릴 것이고, 그래서 결국 이런 저런 떡밥을 계속 투척해야만 하지요. 가끔은 그게 무리수가 되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근데 아까 그건 뭐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은 글에 심폐소생술을 써보자면, <범죄의 재구성>도 그랬습니다. 최창호는 성형외과 의사와 마주앉아 이야기할 때 의사가 "최창혁이 살아있는 거 알면 난리가 날 것"이라는 걱정에 "걱정 마세요. 잘 숨어있는 것 같으니까." 라고 대답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최창호가 최창혁이죠. 의사도 그걸 알고요. 결국 자기가 자기 이야기 하면서 "잘 숨어있는 것 같다"며 남 이야기 하듯 이야기한 겁니다. 최창호가 최창혁인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관객들은 어? 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되죠.

 

<의뢰인>의 경우에도 좀 그렇게 느꼈습니다. 사건이 터지고서 처음 사건 전개는 뭔가 대단한 음모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검찰과 법원측이 같이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좀 거슬리더군요. 부장검사와 법원장 정도의 관계인 걸로 생각이 되는데(직책이 영화에 나오나요?), 검사는 법원장에게 "이 사건 잘 처리하라. 조만간 대법원 심사 있지 않냐?"고 은근슬쩍 압박을 줍니다. 추정컨데 그 법원장이 대법관 후보군에 올라가 있으니, 괜히 이 사건 정의롭게 진범 파헤쳐서 윗선에 찍히고 대법관 탈락하지 말고 우리가 넘겨준 애 빨리 유죄 처리하고 끝내라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그 외에도 세부적으로는 기억나지 않는 대사들에서, 이 사건이 그냥 일개 형사사건이 아니라 뭔가 큰 음모가 얽혀있는 사건이라는 늬앙스를 준다고 느꼈습니다.

 

뭐 알고보니 반전이 있긴 했는데... 대단한 음모는 없었습니다. 이 사건의 재판 결과에 따라 법원장이 대법관이 될지 말지 결정될 것 같진 않던데요? 저만 그렇게 오버해서 느낀 건지...

 

p.s. 그동안 한국 법정 영화는 큰 오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검사와 변호사가 나서서 한참 떠들어대고 논쟁을 벌이는데, 실제 한국 법정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는 거죠. 서로 무미 건조하게 서류나 제출하고 다음 기일 잡고 집에 가면 끝. 배심원제도 없고, 공판중심으로 형사재판이 돌아가지도 않던 나라에서 미국식 법정 드라마를 하려니 생기는 문제였는데, 간만에 법정이 배경인 영화를 보니 얼마전 퇴임한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한국 영화계에 큰 일 했네요. ㅎㅎ 배심원제와 공판중심주의 도입으로 인해 박희순과 하정우는 배심원들을 앞에 놓고 실컷 떠들 수 있었습니다. 웃기는 건 그 배심원들은 결국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 배심원들이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판사가 그냥 결정해버리더군요.

 

p.s. 제가 이쪽 지식이 얕아서... 살인사건인데... 배심원이 있으면 단독판사가 재판할 수 있나요? 판사가 한 명밖에 안보였던 것 같아서 말이죠. 판결문 검색해보니 국민참여재판일 때도 살인사건은 세 명이 붙는 합의부에서 하던데요. 그냥 옥의 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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