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외국어로 번역하기에 그닥 좋지 않은 -가끔은 아주 나쁜-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문체나 표현은 둘째치고 당대 일본문화의 흐름을 모르면 -특히 야구!-재미를 느끼기에 적절하지 않은 글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특히 평론집은 더 그런 느낌이더군요.
전에 번역해 둔 게 하나 있는데 -내용은 꽤 재밌는데 역시 일본사정을 모르면 재미를 못 느낄 부분이 많아서 미친 듯이 주석을 많이 달았죠.-_-;;;- 한번 읽어보시라고 올립니다. '文学がこんなにわかっていいかしら(다소 의역 섞어서 '문학이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거니'라고 번역하고픈)이라는 평론집의 후속편인 '文学じゃないかもしれない症候群(문학이 아닐지도 몰라 증후군)의 첫번째 챕터 '명작은 괴로워'입니다.
좀 깁니다만 재미삼아 한번 읽어보세요.^^
명작은 괴로워
'그런 쓰잘데기없는 소설을 쓰다니, 명작이 무덤 가에서 울고 있겠다'라고 한 건 나다. 아니, 딱히 특정 작품을 가리켜서 규탄한 건 아니다. 자계의 말로써 거울에 보고 외친 거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생각한 거지만, 무덤 가에서 명작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무덤가 하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갔다는 소리다.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 명작'이라니. 아무리 명작이라고 해도 '프랑신의 경우'는 너무 불쌍해. 내 생각으로는 명작이라고 해도 두 종류가 있다. 즉, 현역인 명작과 은퇴한 명작이다. 다자이 오사무같은 것은 아직까지도 현역이다. 기요하라, 아니지. 지금은 좀 슬럼프. 구와타. 이건가. '태어나서 죄송하네요.' 유들유들하기도 하지. 구와타의 여자친구, 아니타 카스텔로는 말했다. '마스미, 벗어서 미안'이라고. 이 사람도 상당히 다자이스럽다. 그런 이유로 다자이의 작품은 아직도 쌩쌩한 현역이다. 그러나 반대로 은퇴한 명작이라는 부류도 있다. 명작이기 때문에 다들 이름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선수가 활약한 장면을 자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은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가끔 '그 사람은 지금' 코너같은 데 출연하더니, 어느샌가 무덤가로 옮겨지는 것이다. 똑같이 야구-----가 아니라, 문학에 뜻을 둔 자로서, 위대한 선배의 은혜를 잊을 수야 없지. 그래서 나는 최근 은퇴한 명작을 방문해 보기로 했는데 이게 의외로 꽤 재밌는 것이다! 뭐랄까, 은퇴한 명작 분들에게는 현역인 명작에게 없는 여유랄까 기품이 느껴진다. 역시 '사양'은 멋지구나. 주인공 가즈코의 우아하고 섬세한 모놀로그.
혁명을 동경해 본 적도 없고 사랑조차 몰랐다. 지금까지 세상 어른들은 혁명과 사랑 두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꺼림칙한 것이라고 가르쳤고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우리들은 그대로 믿어왔지만 패전후, 나는 세상 어른들을 믿을 수 없게 되어 뭐든지 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반대편에 진짜 살 길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혁명도 사랑도, 사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좋고 멋진 일이라서, 너무 좋은 거니까 어른들이 심술궂게도 우리들에게 신포도라고 속여서 가르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났다고.
겉멋만 들었거나 술주정뱅이로서는 이런 문장을 쓸 수 없다. 기개가 있다. 줏대가 있다. 이런 사람은 탱크 위라도 올라갈 수 있다. 일본문학에도 옐친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시카와 준(石川淳)은 셰바르드나제인 건가. 물론 시가 나오야는 고르바초프. 연방해체의 위기이다. 그렇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은 현역인 명작인 것이다. 지금 읽어도 정말 재미있다. 그러나 거기에 문제가 있다. 영원한 명작. 그것이야말로 현역의 필수조건이란 건 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읽힌다는 건 어느 시대 사람에게나 호감을 산다는 소리다. 반대로 말하자면, 어느 시대 사람에게나 추파를 보낸다는 얘기다. 여기에 현역인 명작의 제일 큰 결함이 있다. 두루춘풍이랄까. 그런 느낌. 그에 비해 은퇴한 명작들은 그 시대 독자들에게밖에 사랑받지 못한다. 독자가 죽으면 함께 무덤으로인 셈이다. 실로 우러러볼만한 심성이다. 순정인 것이다. 사랑스럽다. 순진하다. 그런 은퇴한 명작들의 수줍은 표정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갑자기 생각이 난 건데, 현역인 명작과 은퇴한 명작 사이에, '널려서 말려지고 있는 명작'이란 것도 있지 않을까. 명작계의 시노즈카인 셈이다. '왜 기용해주지 않는 건가, 다들 이상하다고 한다'라고 신문기자에게 말해서 거인군단에서 페널티를 먹은 시노즈카 같은 명작. 예를 들어 '돈키호테'. '돈키호테'가 '널려서 말려지고 있는 명작'이라면 하면, 말도 안돼! 하고 꾸지람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마르트 로베르라는 사람은 ''돈키호테'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책이지만 스페인 이외에는 독자가 거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아니야, 나는 제대로 읽었다구, 하고 반론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은 그런 사람들도 대부분 다이제스트판을 읽은 게 아닐까. 저 이케우치 오사무씨도 원본은 길어서 지긋지긋했다고 말했다. 다이제스트판이라고 해도 이와나미소년문고 우시지마 노부아키(牛島信明) 편역은 육백장정도 된다. 원본은 6배. 대충 3천6백장. 이걸로 서평을 쓰려고 하면 여간 일이 아니다. 신기한 건 서평 원고료는 쓰는 원고지량에는 비례하지만, 읽는 책의 양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시나 사쿠라코의 소설과 고지마 노부오의 소설을 똑같이 원고지 2장으로 서평을 써도 원고료가 똑같아서야 누구라도 고지마 노부오 소설 서평은 하기 싫어질 것이다. 순수문학이 쇠퇴해지는 셈이다. 대충 이런 식이라서 '돈키호테'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데 실물을 본 사람은 거의 없다는 말이 된다. '신인이 밀고 온 거라면 납득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나는 지금 컨디션도 나쁘지 않다'라고 하는 '돈키호테'의 호소를 듣고 나는 후지타감독이 아니므로 곤잘레스를 2루에 기용하거나 하지 않고, '돈키호테'를 2루에 기용해 보았다. 지난달의 일이다. 그러자 '돈키호테'는 충분히 현역으로 통용된다는 걸 알았다. '돈키호테'는 너무 장황하다는 게 통설이지만, 이번에 스타팅 멤버로 발탁해보고 안 것은, 그 장황한 점이 매력이라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수다만 떨고 있다. 관계자가 우연히 모두 한 장소에 모이고 만다. 곤잘레스로는 이렇게 안 된다. 어퍼 스잉으로 빨리 홈런을 치고 싶어한다. 역시 시노즈카다. 참고로 세르반테스는 '모범소설집'이라는 작품도 썼는데 이쪽은 한신이라면 곧 4번타자가 될 수 있을 정도의 걸작인데도 지금은 아무데도 출판되어 있지 않다. 프로야구계의 반성을 촉구하고 싶다.
한편, '은퇴한 명작'이다. 나는 메이지 시대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무덤 가를 조사해 보았는데 현재까지 판명된 사실 중 몇가지를 보고해 둔다. 예를 들어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 이 조사를 시작하기 전,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을 알고 있습니까?'하는 질문을 했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질문을 바꿔서 '그럼,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을 읽은 적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모두 읽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이상적인 은퇴선수다. 나도 물론 알고는 있지만 읽었을 리가 없다. 나의 예비지식은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떠나간 걸프렌드가 사용한 이불에 얼굴을 묻고 운다는 것뿐이었다. 실로 약해빠진 녀석이 아닌가. 그런 편견을 가지고 '이불'과 대면한 나는, 읽어가면서 자신의 불민함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재밌는 거다. 이게. 주인공은 그럭저럭 유명한 소설가인데 아내도 자식도 있고 돈도 없다. 여기에 팬인 작가지망생 미인여대생이 밀고 들어와 제자가 된다. 그런 팬이 있으면 나는 기쁠텐데 여기는 메이지 40년대(1900년대)라서 주인공 작가는 고뇌한다. 그 여대생도 고뇌한다. 그뿐인가, 여대생의 보이프렌드도 고뇌한다. 여대생의 파파도 고뇌한다. 번뇌로 고뇌하고 생활로 고뇌하고 사상으로 고뇌한다. 소설이 쓰이면 완성도로 고뇌하고 안 쓰여지면 못 썼다고 고뇌한다. 아무튼 세줄에 한번은 고뇌가 등장한다.
'아내가 없었으면 물론 나는 요시코를 아내로 맞이했음에 틀림없다. 요시코도 역시 기뻐하며 자신의 아내가 되었으리라. 이상적인 생활, 문학적인 생활, 견디기 어려운 창작의 고통을 위로해주었으리라.'
가타이는 진심이다. 고뇌하는 것도 능력이다. 다야마 가타이의 이 고뇌에 대해 웃을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나는 웃고 행복한 자가 되어버렸지만, 마음 속으로는 경의를 표했다. 경박한 문학이 판치는 지금, '이불'은 DH로라면 충분히 기용할 만하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은퇴한 명작으로 이토 사치오의 '들국화의 무덤'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이즈의 무희'가 지금도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는 데 반해, '들국화의 무덤'은 반쯤 은퇴로 내몰리고 있는 것은 불가사의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이건 아마 '들국화의 무덤'이 마쓰다 세이코 주연으로 영화화된 것과 관계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에 비해 '이즈의 무희'는 미소라 히바리이다. 그러고 나선 야마구치 모모에다. 더군다나 나이토 요코인 것이다. 무려 최근에는 사쿠라기 루이가 주연한 AV까지 나왔다. 참고로 사쿠라기 루이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도 출연하고 있다. 소세키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AV가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AV판 '고양이'에는 사쿠라기 루이가 섹스하는 장면을 고양이가 가만히 쳐다보는 장면이 한 부분 있는 것 외에는 소세키의 작품과 전혀 관계가 없다. 이 부분에서는 소세키도 은퇴가 가까운 걸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들국화의 무덤'은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이다. 비극이기 때문에 주인공 마사오(政夫)와 사촌 다미코(民子)는 헤어져야 한다. 거기까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 딱히 읽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했지만, 아무튼 조사를 해야 하니까 읽어 보았다.
이미 10년 이상 지난 옛일이기 때문에 세세한 사실은 잘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그때 일을 생각하면 마음만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한없이 눈물이 솟는다.
이게 서두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건 주인공이 잘 우는 녀석이라는 것으로 '이불'도 그랬던 걸로 봐서 명작이 은퇴하는 경우의 키포인트가 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뒤를 읽으면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상태에서, 잊으려고 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자꾸 생각이 나서 꿈꾸는 듯한 심경으로 그 생각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글로 좀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라고 쓰여 있다. '글로 좀 써볼까'라니. 지독한 놈이로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냉혈한. 그렇게 생각하게 해 놓고선 후반은 눈물, 눈물의 대홍수가 된다. 정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설이다. 참고로, 내가 읽은 '들국화의 무덤'은 메이지문학전집54권 3페이지에서 23페이지까지였는데, 15페이지 이후로 후반 9페이지만 쳐도 '울다'는 말이 49번이나 등장한다. 이래서야 이 쪽이 울 틈이 없다. 마른 눈물.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되지. 아무리 마쓰다 세이코로 영화화되었다고 해도 말이야. 아무튼 이 밖에 현재 판명된 것만으로도 내 손에 있는 '은퇴한 명작' 중 명백히 현역으로 통용될 만한 것이 40명 정도 확인되었으나 그건 또 다음에 알려주기로 하자. 하고, 여기까지 써서 원고를 보냈더니 편집부 요시다씨에게서 '3줄 모자란데요'하고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 소리를 해도 더 쓸 게 없다구. 아, 딱 맞네.
-'글로 좀 써볼까'라니. 지독한 놈이로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냉혈한. 그렇게 생각하게 해 놓고선 후반은 눈물, 눈물의 대홍수가 된다. 정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설이다. -
이 부분에서 많이 웃었네요. 소설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