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과 메뉴얼

2024.10.17 17:01

돌도끼 조회 수:71

썩 잘살지는 않는 나라의 컴퓨터 시장은 대개 비슷하게 시작했습니다. 무단 복제.
초창기 가장 대표적인 컴퓨터인 IBM-PC와 애플][가 기존에 시중에 나와있는 부품들을 조립하는 방향으로 디자인 된 거다 보니까, 코모도어64 같이 커스텀 칩으로 만들어진 기종과 달리 누구나 카피하기가 쉬웠고, IBM은 아예 복제를 방조하기까지 했죠.

하드웨어가 이럴진데 소프트웨어야 뭐 말할 것도...
소프트웨어는 비싼 하드웨어를 사면 당연히 무제한 공급해주는 거라고 여겼습니다. 하드웨어는 기기를 만져볼 수 있는 실물이 있고 덩치도 컸으니까 비싼 돈을 주고 사는게 당연하다 여겼지만, 소프트웨어는 그냥 달랑 엽서 한장만한 크기의 얇은 플라스틱 쪼가리에 불과하니, 구하는 사람이나 공급하는 사람이나 이게 가치가 있는 거라는 생각을 못한 거죠.

한국도 그렇게 시작한 나라이고, 개인용 컴퓨터 시장 초창기의 한국에서는(아마 다른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소프트웨어를 근수를 매겨서 팔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복사해준 거죠. 게임이라면 얼마나 잘만들었냐 재미있느냐와는 상관 없이 디스크 장수로 가치가 결정되었습니다. 장당 복사비용 얼마라는 식으로. 그래서 디스크 여러장 차지하는 대용량 게임을 복사하려면 애들이 출혈을 감수해야 했죠. 그 비싼 돈을 주고 갖고 왔는데 재미가 없으면....

아날로그 매체들은 복제를 거듭하면 기하급수적인 열화-손실이 발생하지만, 디지탈은 억만번 복제해도 손실 없이 원본과 같습니다(중간에 전송오류가 나서 데이터가 변형되는 경우가 꽤 많았지만ㅎㅎ)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 게임을 복제해주는 업자는 원본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었죠. 원본 패키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못해본 업자들이 많을 겁니다. 게임같은 컴퓨터 데이터는 꼭 물리 매체가 바다를 건너와야만 전달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예 패키지 자체가 국내에 들어온 적도 없는 경우도 많았던 걸로 압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려면 매뉴얼을 봐야합니다. 게임도 예외가 아니죠. 오락실 게임이라면 대부분 사람들이 매뉴얼 없이도 눈치로 대충 사용법을 알아냅니다만, 컴퓨터 게임은 그보다 훨씬 복잡해서 매뉴얼 없이는 난감한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게임 룰이나 사용 방법 이런저런 정보 뿐 아니라, 8비트 시절에는 컴퓨터의 램이나 매체나 용량이 하도 볼품없었기 때문에 게임의 내용을 게임 안에 다 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배경이나 설정, 기본 스토리같은 건 거의 매뉴얼에만 나와있었고, 게임을 진행하는 스토리까지 매뉴얼에다 써놓기도 하는 등, 게임하는 도중 내내 매뉴얼을 참고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죠. 그러니 매뉴얼이 복제방지장치 역할도 했습니다. 없으면 게임을 시작도 못하고 진행도 못하니.

그렇게 매뉴얼은 꼭 있어야하는 거였지만, 패키지도 안가지고 있는 업자들이 매뉴얼은 가지고 있겠습니까.
그나마 좀 더 본격적인 업자들은 복사한 매뉴얼을 준비해두고 재복사를 해주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 매뉴얼은 없는게 당연하고 보통은 처음 실행하는 데 필요한 암호표 정도나 복사해주고 게임 방법은 오락실 게임처럼 니가 눈치로 알아내라는 식이었죠.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잡지의 게임 공략입니다.
게임 매뉴얼에 실려야할 내용이 게임잡지에 실린 거죠. 물론 잡지 기사로 나가는 거니까 매뉴얼 내용이 온전하게 다 실리진 못하고 필요한 것만 추려서 나왔죠.(드물긴 해도 대범하게 진짜 매뉴얼 전체를 다 실어준 경우도 있긴 합니다.)
게임 공략은 매뉴얼에 나온 정보를 다 전해주진 못해도 게임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정보는 매뉴얼보다 더 자세히 알려줍니다. 아예 시시콜콜 하나하나 다 설명해서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끝을 볼 수있습니다. 힌트 정도도 아니고 워크스루. 그러니 게임도중에 매뉴얼을 참고할 필요도 없어지죠.
그러다보니... 매뉴얼이 아닌 공략을 보고서는, 게임의 배경 이야기나 세계관 설정도 모르면서, 진행만 하고 엔딩만 보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런 형편이다보니 그시절 게임의 히트를 결정하는 게 잡지사였다고 할 수도 있을겁니다. 잡지에 공략이 나온 게임은 너도나도 복제해와서 해보는 거죠. 물론 잡지에 공략 나왔다고 다 히트하는 건 아니지만, 공략 안실린 게임은 히트할 가능성이 낮아지죠. 해보고 싶어도 매뉴얼도 없는데 어찌하는지 몰라서 할 수가 없으니까요. 잡지사의 간택을 못받은 게임은 그냥 묻혀버리는 거죠.


직접 맨땅에 헤딩해가며 알아내는 하드코어들도 있기야 했지만... 게임에 대해 다 파악하지는 못하고 그냥 진행해서 엔딩 보는 거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같습니다. 끝내고 나서도 뭔 내용이었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많았고... 글구 잡지에 실린 공략도 게임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한 경우가 많았어요. 공략전문가라고 해서 언어전문가는 아니었으니까... 그니까 그 시기에는 게임을 한다는 게 게임을 제대로 즐긴다기 보다는 엔딩 봤다=깼다는 성취감을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기도...(물론 장르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 글은 매뉴얼 없이는 못할 게임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니까 그냥 그러려니 생각해 주시길...)

PC 통신 시대가 되면서는 잡지뿐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공략을 만들어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통신 동호회의 게임 자료실에 올라온 공략들을 당시 사람들은 '메뉴얼'이라고 불렀습니다. 공략과 매뉴얼은 완전히 다른 거지만, 게임 패키지 그림이 어찌 생겼는지 구경도 못해보고, 실물 매뉴얼을 만져본 적도 없이 게임 데이터만 달랑 복사 혹은 다운로드해서 게임을 했던 그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공략이 곧 매뉴얼이고, 매뉴얼이 해야할 일을 게임 공략이 했으니까요. 그래도 뭐 당시에는 다들 '메'뉴얼이라고 했었으니까, 매뉴얼과 메뉴얼은 다른 거라고 보면 될지도...ㅎㅎ

잡지만 있던 시절에는 지면의 물리적 한계 때문에 소수의 게임밖에 공략이 나올 수 없었지만( 게임 전문잡지가 생기면서부터는 공략이 실리는 게임의 가짓수가 늘어나게 됩니다만) PC 통신상의뉴얼은 그런 제한이 없어서 훨씬 다양한 게임들이 올라오게 됩니다.  대신에 그나마 자료 수집 능력은 있는 잡지사와 달리 개인이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진행한 게임 기록을 올려놓은 경우가 많아서 퀄리티는 좀 떨어질 가능성이 있지만, 그래도 없는것 보다는 낫잖아요.


PC 통신 자료실에는 메뉴얼에 그치지 않고 게임 본체까지도 올라왔으니 더이상 돈주고 게임을 복사할 필요도 없었죠. 그래서 그 시기에 PC 통신의 게임동호회에 발붙이고 있던 사람들은 다운 받은 게임을 매뉴얼 보면서 고대로 따라해서 고는 바로 지워버리고, 다시 다른 게임을 받아서 하던... 게임을 하나하나 즐기면서 한다기 보다는 얼마나 많은 게임을 얼마나 빨리 깼는지를 게시판에 자랑하는 데 더 열중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PC 통신의 초기는 국내에 정품시장이 생성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만, 사람들은 만원 단위의 돈을 주고 사야하는 정품보다 훨씬 적은 돈을 들여서, 혹은 아예 공짜로 다운받을 수 있는 걸 굳이 돈주고 사려하지 않았고, 게임을 제값 주고 살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죠. 그래서 정품시장이 정착되기까지 한동안 고전해야만 했습니다.(근데... 초창기의 정품게임은 복사 게임과 별 다를 것도 없으면서 비싼 돈주고 정품 사는 메리트가 '난 정품 산다'는 자부심 밖에 없는 경우도 꽤 있었던...)
그래도 어찌어찌 게임 판매시장은 형성이 되었고, 그렇게 번듯한 정품과 매뉴얼(번역이나 질은 논외)을 사람들이 많이 접하게 되면서부터 공략을 메뉴얼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어지게 되고, 게임 공략은 제 이름을 찾게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은 종이 매뉴얼은 사라진지 꽤 된 것 같고, 이제는 아예 패키지도 안만든다는 것 같고... 게임은 다운로드 받아야 한다고 하고, 개별적으로 파는게 아니라 일정액 내고 거의 무제한으로 할수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뭔가 복사해서 게임하던 시절의 환경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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