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2 12:25
Afire, Roter Himmel, 2023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으로 보았어요. 어제 영화의 전당에서 봤는데 막판이라 상영관 찾기가 더욱 힘듭니다.
이 감독의 영화 본 것 중에 시각적 규모의 면에서 가장 소박하지 않았나 싶은데 가장 큰 화면으로 보았네요.
첫 인상은 홍상수 스타일인데?였습니다. 해안가, 인접한 숙소, 식사와 술을 나누게 되는 만난지 얼마 안 된 사람들, 어긋나는 대화, 결정적으로 중심 인물의 찌질한 언행이 그런 연상을 하게 했어요. 중반까지 비슷한 면이 있어요.ㅎ.. 아래 내용이 좀 들어갑니다.
두 번째 책을 준비 중인 레온과 예술학교 준비 중인 펠릭스가 펠릭스 엄마 소유의 별장에 도착하고 거기서 만나게 된 나디아와 인명구조원 데비드와 어울리는 며칠 간의 이야기입니다.
레온을 제외한 인물들은 수영도 하고 집도 고치고 베드민턴도 치고 음식도 돌아가며 하고...서로 어울리고 사귀고 즐깁니다만.
이 영화의 주인공 레온은 다른 인물과 다릅니다. 레온은 언제나 '일(소설쓰기)'이 중요한 듯, 다른 행위들은 무시해도 되는 무시해야 되는 것인 듯 말합니다. 레온을 제외한 인물들은 타인에 대한 예의와 유연하고 열린 사고를 갖고 있고 모두 소통에 어려움이 없어요. 좀더 정보가 풍부하게 드러나는 나디아란 인물에 대해 얘기 하자면 페촐트 감독의 이전 영화 '운디네'에 나온 물의 요정이 완전히 인간으로 환생한 존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벽한 인간입니다. 학위를 준비 중인 문학도이면서 자신을 아이스크림 판매원으로 알고 있는 레온에게 (레온과는 달리)자신의 전공, 정체성에 대해 티를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인생의 순간들을 즐깁니다. 뭔가 생명의 꽃같은 존재예요. 페촐트 감독에 의하면 부러 헌자전거와 투박한 신을 장착시켰음에도 한 순간에 그것들을 포함해서 모두 우아하게 변모시켰다고 합니다.(애초에 폴라 비어에게 맡겼으면서 이런 말은 좀...)
레온은 이런 인물들 안에 끼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합니다. 처음에는 나는 작가니까 그래도 괜찮아 쟤들과 다르다,라고 생각했겠지만 영화가 진행되며 자신의 작가 정체성의 알량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바라봄'마저도 '나는 작가니까'라는 생각 때문에 방해를 받아 부실하기 짝이 없어요. 제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작업 중인 형편없는 글에 매달려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자기 편의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볼 뿐입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도 자연에 대한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자연이 죽어나갈 때까지 말이지요.
이랬던 레온이 사건의 연속 속에서, 느끼는 사람으로 나아가고 조금 더 나은 글을 쓰는 작가로 나아가는 결말이었습니다.
레온이 어리석고 편협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안에 있는 그런 결함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런 결함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나디아처럼 완벽한 인간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것처럼요. 여러 가지 결함과 삐죽삐죽한 정서를 지닌 사람으로서 레온의 저 해안에 어울리지 않는 거무튀튀한 복장이 이해가 되거든요.
영화의 방향과는 다르지만 그런 생각도 들어요. 작가가 글을 쓰자면 언제 살겠는가? 잘 사는데 시간을 쓴다면 언제 쓰겠는가? 하지만 잘 바라보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참 소박한 감상을 짧게 썼으나 씨네21의 평을 보니 이 감독님의 영화들이 그렇듯 여러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인가 봅니다.
아무튼 이번 영화도 잘 봤습니다.
이 대조를 보세요.ㅎ
통렬한 바다
2023.11.02 13:23
2023.11.02 14:42
감독 말에 의하면 프랑스나 미국에는 있는 일련의 여름 휴가 영화가 독일에는 없다네요. 이 영화를 그렇게 본다면 참으로 독일식의 진중한 여름 휴가 영화가 아닌가 합니다.
레온 비롯 우리의 무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데 필요한 희생이랄까 상처가 너무 크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처음에 레온과 나머지 인물이 너무 대조가 되는 것이나 최소 이십 대 중반을 넘고 작가이기도 한 레온을 너무 편협하게 그리는 것이 무슨 의도일까 생각했는데 그런 인물이기 때문에 변화도 아주 조금, 천천히, 하지만 설득력 있게 가능한 게 아닌가 했습니다. 마지막 장면까지 레온을 그리 호감이 가게 표현하진 않았던 거 같아요. 그냥 글이 이전보다 조금 나아져서 출판이 가능한 정도라고만 보여 주고 끝나니까요. 아주 인색한 정도의 변화, 발전이며 그래서 설득력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23.11.02 15:41
저는 마지막까지도 레온에게 마음 한 켠 주기 어려웠던게, 과연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그것을 아무리 추모의 의미라고 해도 책으로 내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도 그렇게 변하진 않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은 무엇일까, 저는 선문답 같은 그 대화가 떠오르는데요, 바다를 보는 사람을 찍어도 사진을 봐서는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다, 마지막에 뒷 모습의 사진을 책에 넣게 되죠. 사진 안에 있는 것만으로 사진 바깥을 추론하고 이해할 수 있냐는 그 대화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듯 합니다.
저는 이 극이 어떤 교훈극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어떤 작은 것들을 무심하게 대할 때 받는 결과는 이와 같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인생사가 보통 다 그런 것이고요. 어떤 면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이만큼을 다루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서 이 작품이 좋았습니다.
2023.11.02 18:49
레온에게 호감이 안 가게 표현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진에 대해서는 어떤 인물이 어떻게 언급했는지 놓쳐서 이해가 분명히 안 되는데 레온 말고는 펠릭스의 보는 사람들을 찍은 사진 작업에 다 긍정적이었던 거 같아요. 레온만 시큰둥한 반응이었던.ㅎ '본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거 같은데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의미는 잘 모르겠어요. 영화를 언제 다시 보고 고민해야 알 듯요...
저도 일상에서 작은 것에 무심한 편이라 레온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고 찔리기도 했습니다. 주변인에 세심하지 못 하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나디아가 질투났습니다.ㅎㅎ
2023.11.02 16:12
용산에서 페촐트 감독이 참석하고 이동진 평론가가 진행할 예정의 GV의 좌석에 앉아있었는데요. GV시작 전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몸 컨디션이 안 좋기도 했지만, 영화가 보는 자신에게 현타 줄만큼 뭔가 찔리기도 한데... 상태가 나쁜게 제일 큰 원인이지만 영화 초반에 그냥 나왔습니다.
영화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주인공이 보여주는 어떤 모습이 어느 관객에겐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면서 견디기 어렵게 만들었을지도요. 페촐트 영화는 어파이어가 처음인데, 어렵네요.
2023.11.02 18:57
아마도 컨디션이 안 좋으셔서 인물이 더 견디기 힘드셨겠죠.
보면서 재미도 있었으나 보고 나선 자꾸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 영화였습니다. 이 감독의 영화가 대체로 그러네요. 하지만 어디서 오는지는 모르지만 보는 동안 느끼는 즐거움이 있고 그에 만족해도 되겠다 생각해요.
2023.11.03 07:08
강남에서 이정도 '급'의 예술영화는 보통 작은 상영관에서 하거든요. 그런데 <어파이어> Roter Himmel Afire는 200석이 훨씬 넘는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했어요. 이렇게 생각할게 많은 좋은 영화를 만난 날은 정말
머리가 환해져요. 크리스티안 페촐트 (Christian Petzold)의 다른 작품은<열망>(2008), <바바라>(2012), 그리고 <운디네>(2020)를 보았어요. 저번 CGV에서 했었던 감독전의 <피닉스>(2014)를 놓친건 많이 아쉬워요.
제가 추천드리고싶은 페촐트 영화는 <바바라>여요. 폴라 비어 전 감독의 '뮤즈'였던 니나 호스가 나와요. 배경은 동독, 감시 뭐 이런 이야기인데 엄청난 멜러여요. 램브란트 이야기가 중요한 흐름으로 나오고 암튼
이렇게 멋진 남자 주인공은 '고전 영화' 이후에 처음 봐요! 리뷰 한번 보셔요.
냉전시대 동독에서의 삶 <바바라> (cine21.com)
2023.11.03 10:17
페촐트 감독의 영화는 고전 영화 분위기가 나죠. '바바라'도 '피닉스'도 그랬습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다루지만 시각적 잔인함은 없고요. 저도 '바바라'를 무척 좋아합니다.
2023.11.03 09:14
정성일 평론가 해설 끼워서 봤습니다. 평상시 여러 사회 문제를 연인 간의 갈등에 비유해서 풀어내는 감독이었는데 이번만큼은 연인 관계라거나 애정이랄 게 아예 존재하질 않고 어리석은 주인공의 독선만 계속 보이니 좀 승질이 나더군요 ㅎㅎ 식탁에서 네명이 함께 식사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현재 독일과 세계에서 일어나는 차별의 한 장면이라고 해설을 하던 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으로 사진이 나오는만큼 사진의 구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사진작가 이름이랑 책도 알려주셨는데 까먹어버렸네요 저도 곱씹어볼 겸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ㅠ
2023.11.03 10:35
편견과 독선이 한편으로는 타인에 대한 질투에서 생기는 것임을 생각하게도 됩니다. 아직 다른 인물이 나타나기 전, 펠릭스가 웃옷을 벗고 해변으로 갈 때, 지붕에 올라갈 때 드러내고 움직이는 몸을 레온이 유심히 보는 장면이 있었는데 자기에게 없는 유연함 같은 것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유연하지 못함, 좁고 막힌 사고 같은 자기 결점들이 더욱 두드러지고요. 그 결점을 감추려 하니 편견과 독선은 더 강화되는 거 아닌가 싶었어요. 자신에게 부족한 아름다움에 대항하려고 더욱 별볼일 없는 자기 것을 주장하는 모습을 느꼈습니다. 쓰다보니 저도 해당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리뷰를 써야지 하다가 결국 못 썼네요. 저도 영화관에서 봤고, 무슨 내용이지 하나도 모르고 가서 봐서 혹시 내가 공포영화를 고른건 아니겠지? 하고 매우 쫄았던 초반부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으면서도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ㅋㅋ.
이 영화는... 다 보고 나서 상처입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슬그머니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와 갑작스레 페인팅 나이프로 촥 긁힌 기분이라고 할까요. 저는 어떤 나은 결말에 도달했다기 보다는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을 경험한 기분이었어요. 나디아가 그렇게 많은 기회를 줬는데도 관계를 놓쳐버리죠. 살면서 누구나 미숙한 때가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해서 무언가를 망쳐버리기도 하니까, 그런 경험들이 어슴푸레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저는 여러 장면들 중에, 해변가로 사라지는 사람들 모습이 이유는 모르게 깊게 남았습니다. 대본에 '그들은 마법처럼 숲 너머로 사라졌다'고 써져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무래도 펠릭스는 레온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겠죠? 그러니 초반의 몸다툼에서 미묘한 기류가 흘렀고요. 근래 본 중 좋은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