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1 00:34
시어도어 드라이저(1871-1945)가 1925년에 발표한 소설입니다.
아래에 소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주인공 클라이드 그리피스는 가난한 전도사 부부의 맏아들입니다. 클라이드는 십 대에 접어들어서까지 부모를 따라나가야 하는 길거리 전도를 창피해 합니다. 왜 안 그렇겠나요. 그리고 딴 애들이 흔히 갖는 괜찮은 물건 하나 가질 수 없는 가난에 대한 내면의 반발이 큽니다. 잦은 이사로 제대로 교육도 직업 훈련도 못 받은 채로 우연히 호텔 벨보이로 취직합니다. 도심지의 호텔이란 어떤 곳인가. 자본주의의 (부패한)꽃? 자본주의의 거품? 십 대의 주인공에겐 별세계입니다. 부모가 늘 입에 담는 성경 말씀은 극빈한 가정 형편에 반사되며 클라이드에게는 공허할 뿐입니다. 그런데 호텔이라는 곳은 그 정반대의 모든 것을 펼쳐 보입니다. 효율적인 체계로 돌아가고 반짝거리는 물건들과 세련된 사람들로 넘치고 게다가 별일도 아닌 수고에 팁이 따릅니다. 이 첫 직업은 주인공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성실하게 일군 작은 행복은 지루하며 자신과는 거리가 먼 계층의 화려한 물질 세계의 아름다움에 끌립니다.
이십 대가 된 주인공은 그동안 호텔 동료들과 저지른 고향에서의 작은 사건 여파로 이곳저곳 떠돌다 사업하는 큰아버지와 연이 닿아 그 공장에 취직하고 본인은 재산 한 푼 없지만 그 도시의 유명인사인 큰아버지 이름 덕에 사교계에 발을 담그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이 소설은 이런 기질의 주인공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기와 비슷한 계층인 로버타, 상류 계층인 손드라라는 두 여자와 관계를 갖고 암담한 결말을 향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에 본 영화 '젊은이의 양지'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으므로 삼각 관계의 막장 멜로물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소설이 갖는 고유의 특징이 있으니 다르게 접근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소설은 제가 좋아하지 않는 삼각 관계 멜로물의 심화 확장판이라고 할까, '청춘의 덫' 류 드라마의 원조와 같은 위엄으로 예측가능한 일들을 세밀하게도 전개시켜 저를 압박해 왔습니다.(하마터면 읽기를 포기할 뻔) 단, 이런 감상은 두 권으로 나온 을유문화사판을 기준으로 상 권에 해당됩니다. 상에서 이미 클라이드의 마음은 로버타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고 하 권의 초반에 문제의 '호수'로 갈 생각에 사로잡히는데 하부터는 이 작품의, 모든 것을 짚고 가는 식의 세밀한 전개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냥 넘어가는 장면이 없어요. 호수에서 클라이드와 로버타가 보트 위에서 어떤 상황이었는지 읽을 때를 기점으로 상 권을 읽을 때는 헛웃음이 났던 책의 표지에 적힌 문구 - '미국판 <죄와 벌>로 평가받는' 다는 그 문구를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보트 사건 이후 후반부로 가며 훨씬 재미있었어요. 재판 과정에서 클라이드의 인생과 로버타와 있었던 일들이 모두 복기가 되는데 다 알고 있음에도 흥미롭고요, 이건 같은 내용이라도 클라이드를 타자화하여 일반적인, 외부인의 언어로 표현하며 생기는 효과가 있었으니까요. 수감되고 마지막에 이르는 뒤의 100페이지는 이전까지 주인공의 환경과 대비되는 충격 효과와 더불어, 위에서도 썼듯이 작가가 비켜가지 않습니다...정면대결이로구나 싶습니다.
이 소설은 손드라를 향한 갈망으로 인해 자신들을(자기들끼리) 죽이는 이야기였어요. 로버타는 클라이드 자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클라이드가 호수의 보트 위에서 극한 갈등에 빠진 자신을 혐오하는 부분을 조금 옮깁니다. 클라이드의 표정이 너무 이상하여 로버타가 기어서 다가옵니다. '그러자 클라이드는 순간 자신의 실패, 자신의 비겁함, 자신의 무능력을 뼈저리게 깨닫는 동시에, 또 순간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로버타에 대해, 그녀의 힘 또는 이런 식으로 그를 구속하는 인생의 힘에 대해 잠재되어 있던 증오심의 파도에 굴복했다.' 클라이드는 로버타를 자신의 인생으로 생각해요. 그렇게나 벗어나고 싶었던 누추하고 옹색하고 빈곤한 인생입니다.
이 작품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떠오르게 했습니다. 해설을 보니 다른 몇 소설과 함께 역시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발표 연도도 1925년으로 같네요.
엇, 이틀에 걸쳐 썼네요. 자정 너머까지...마무리가 부실하지만 이만 자야겠습니다.
2023.08.01 02:44
2023.08.01 10:00
너무너무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지만 그걸 어떻게 푸느냐,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을 보면 작가들이란 대단한 거 같아요.
뭐냐 이런 뻔한 이야기를 읽어야 할까 주춤거리면서 읽어나가다가 뒤로 가면서 굴복을...
전부터 그랬지만 더욱더 로이배티 님을 귀감으로 삼으려고 노력해야겠어요. ㅎㅎㅎ
2023.08.01 10:52
젊은이의 양지 원작인가요? 오 신기하네요. 소개해주신 내용만 봐도 굉장히 흥미진진합니다. 이 부분에서 thoma님과 저는 소설 취향이 좀 갈릴 것 같은데, 저런 삼각관계를 저는 아직까지 좋아하거든요ㅋㅋ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2023.08.01 13:03
스물 세 살 여자로부터 열 여덟(고작!)짜리 여자에게로 가고 싶어 몸부림치는 스물 한 살 남자의 이야기인데 그 찬란한 신분 상승을 향한 연애의 사다리는 어느 사이에 뚝 끊어져 버뮤다 삼각지대로 삼켜지는 거이었습니다...
종교, 결혼제도, 사법제도 등 계층을 공고하게 하는 여러 제도들을 생각하게도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2023.08.01 22:34
글 잘읽었어요. 감사해요. 난독증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지못해요. 극장에서만 영화를 보기 때문에 이 작품도 못보겠죠. 영화에서 로버타로 나온 셸리 윈터스가 기억에 남아요. 이 표현 재미있네요. "쉘리 윈터즈는 역할에 걸맞는 설정을 위해 수수한 외양으로 나오지만 금발미녀 부류에 속하던 배우다."
젊은이의 양지(영화) - 나무위키 (namu.wiki)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두번 받았고요.<사냥꾼의 밤>이나 큐브릭의 <롤리타>에도 나오는데 불쌍하고 처연한 역할들이어요.
2023.08.02 09:49
손드라가 엘리자베스 테일러였던 것만 기억하고 로버타 배우는 기억을 못했어요. 이것도 참 내용과 연관되기도 하고...난감하고 안타까워요. 저의 영화에 대한 관심 정도가 이렇습니다. 연결해 주신 듀나 님 글 너무 재미났어요. 셸리 윈터스 배우는 이름을 외우진 못해도 얼굴 보니 여러 영화에서 뵌 분이군요. 듀나 님 글과 마찬가지로 저도 '포세이돈 어드벤처', '사냥꾼의 밤'에서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물' 그러네요. 물과 죽음이 연관된 역할을 꽤 하셨네요. 만만찮은 여자 역할 많이 하셨고 실생활도 잘 사셨다고...덕분에 이분을 이젠 안 잊을 거 같아요. 감사드립니다.
2023.08.02 09:33
책욕심이 많아서 저도 읽으려고 봤는데 상,하 2권인데 두권다 800페이지가 넘는책이네요
2023.08.02 09:53
본문은 그에 살짝 못 미치는 780 안팎? 작가가 위에 썼듯이 워낙 대충 건너뛰는 면이 없어서 힘든 면도 있었어요. 여튼 좋은 소설이었습니다.ㅎ
아. 뭔가 어중간하게 익숙한 느낌이 든다... 했더니 '젊은이의 양지' 원작 소설이었군요. 소설은 안 읽었지만 어차피 영화도 하나도 기억이 안 나니 언젠간 다시 한 번 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 thoma님 글이 좀 뜸해져서 책을 너무 열심히 읽으시는 걸까, 아님 요즘 못 읽어서 글이 뜸해지신 걸까 궁금해하고 있었어요. ㅋㅋ 글 잘 읽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