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6 10:09
입장하기 전부터 알싸하게 퍼지는 술냄새 때문에 당황했습니다. 컨디션도 안좋고 재채기도 엄청 해서 마스크 쓰고 있었는데도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술냄시... 오후 세시쯤에 갔는데 입구 주변에서 이미 쇼핑을 끝낸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양반다리 하고 다들 자빠져 계시더군요.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도 있고... 복작복작~~ 한 게 피터르 브뤼헬의 그림 같았습니다. 캐리어를 끌고 오신 분들도 꽤 많았고 기본적으로 바퀴달린 짐짝은 하나씩 구비해서 끌고 다니시더군요. 이 광경 자체가 뭔가 슈르리얼해서 게임 속의 캐릭터가 된 것 같았습니다. 앉아있는 사람들한테 말을 걸면 띡 하고 말풍선이 나올 것 같은...
사람이 뭐가 이렇게 많은지... 다른 사람들이 호들갑 떠는 것보다는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런 분위기에서는 컵도 몇개씩 깨지고 우당탕탕 대소동이 일어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싶었습니다. 가고 싶은 부스를 우선순위로 체크해놓길 천만 다행이었습니다. 이동 자체가 좀 버겁더라구요. 코엑스에서 이런 페어하는 걸 몇번 와보긴 했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단체로 설레고 흥분해있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있고 어떤 분들은 눈이 살짝 풀려있고...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다 들떠있었습니다. 본인 전용 유리잔을 들고 와서 이동하는 걸 보고 있으면 괜히 위태롭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입구를 기준으로 왼쪽 부스와 오른쪽 부스의 인파가 좀 차이가 나더군요. 왼쪽에서 한참을 기다려서 몇몇 부스의 맥주와 위스키를 시음했는데, 오른쪽 부스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습니다. 국내 중소기업들의 부스라서 그랬을수도요. 저는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 좀 달다구리 술들이 그나마 입에 맞았는데, 우미유즈로 유명한 일본 과일사케 부스가 제일 입에 맞긴 했습니다. 복숭아 사케가 좀 맛있더군요. 오른쪽 국내 중소기업쪽 부스에서는 금군양조라는 곳의 술이 제일 인상깊었습니다. 꽃술? 이라고 하는데 좀 들척지근한 감미료 맛이 아니라 향과 맛이 산뜻하게 퍼지는? 처음 먹었던 아카시아 향이 제일 맛있었네요. 현장에서 주문해놓으면 싸게 살 수 있다고 해서 냉큼 샀습니다.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많이 쟁여놓지 못해서 아쉽더군요. 나중에 친구들과 기회 잡아서 한번 마실려고 합니다.
이런 데서 쓸데없이 괜한 걱정에 혼자 허우적거렸는데, 이렇게 시음회를 하면 아무래도 좀 영업력을 발휘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좋은 목을 잡아놓고 있는 부스에서 전통 증류주를 팔고 있었는데 사장님 부부가 너무 소극적이더군요. 다른데는 부스를 꾸미려고 컵도 쌓아놓고 이것저것 피규어나 장식같은 것도 해놓고 브로슈어도 갖다놓고 했는데 여기는 정말 술이랑 컵만 갖다놓고 사장님도 고객을 끌어모으지를 못하더군요. 술을 마실 때 이 술은 어떤 술이다, 목넘김이 좋다, 숙취가 없다, 이 가격에 이런 퀄리티는 쉽지 않다 이런 저런 말도 덧붙이고 할 법한데... 어차피 살 생각은 없었지만 좋은 자리에서 사람들이 좀 휑한 게 마음이 안좋았습니다. 이런 게 다 사업체질이고 캐릭터겠지만 그래도 좋은 기회 잡으셨으니 영업이라도 잘 하셨으면 좋았을텐데...
좀 돌다가 약간 현타도 왔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리큐르 중에 파이어볼이라는, 계피향 진하게 나는 제품이 있습니다. 딱히 고급이라고 할 순 없고 마트에서도 싼값으로 구매 가능한 리큐르인데요. 이 파이어볼 시음을 하려고 사람들이 엄청 길게 줄을 서있는 겁니다. 아니 이걸 왜...?? 차라리 비싼 와인이나 평소에 접하기 힘든 제품이면 모르겠는데, 이건 진짜 흔하디 흔한 리큐르거든요. 이걸 보면서 "줄을 서서 뭔가를 소비하는" 문화 자체에 대해 좀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과연 지루한 기다림을 투자할만큼 어떤 상품은 가치가 있는가? 뭐 그런 게 주류박람회의 재미라면 또 할 말 없습니다만...
칵테일 대회도 하더군요. 여자 바텐더분이 우승하셨는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감동의 도가니탕으로 대회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저희는 좀 돌다가 술기운도 슬쩍 올라오고 앉지도 못한 채 몇시간동안 돌아다니면서 술마시는 게 힘들어서 나왔습니다. 내년에는 주류박람회 부스들을 확인해보고 그 술들을 직접 사서 마셔보기록 했습니다 ㅎㅎ 박람회를 채우는 건 젋은이들의 몫으로....
2023.06.26 10:31
2023.06.26 11:01
요새는 좀 피지컬한 경험을 나누는 게 더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보네요. 만약 가시게 된다면 들리고 싶은 부스 체크하시고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국내업체들 술을 마시는 게 더 즐거웠습니다. 와인쪽은 사람들이 너무 많더라구요.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편이라...
2023.06.26 12:38
다양한 현장을 가시는데 이번엔 주류박람회까지 다녀오신 후기글을 읽자 '구경꾼의 탄생'이라는 오래 전에 읽은 책이 생각이 납니다.ㅎ 쇼핑몰, 시체전시부터 시작해서 영화에 이르는 구경거리를 찾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근대적 삶의 모습을 연결지었던 책이었는데요. 거기도 시체를 보기 위해 모인 인파와 줄서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쓰신 본문의 '줄'이 연상을 시킨 면도 있나 봅니다. 줄서기라는 게 여러모로 흥미로운 행위란 생각이 듭니다. 글 재밌었습니다.
2023.06.26 12:49
아니? 굉장히 흥미로운 책 제목이군요. 그러면서도 괜히 "난 구경군 따위(?)가 아냐!!" 라고 저항하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 당시 사형집행은 대중들에게 최고자극을 주는 엔터테인먼트였다고 하는데 아마 저는 분명히 보러 갔을 것 같습니다. 현대미술에서도 시체나 죽음을 다루는 작품들을 이상하게 좋아하는 성향도 있고요 ㅋ 구경꾼의 탄생이란 책을 쟁여놨다가 나중에 봐야겠군요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다행입니다!
뭔가 부쩍 메이저(?) 행사들을 방문한 후기를 쓰시는걸 보니 기분이 묘합니다 ㅋㅋ. 이런 저런 방문 팁만 들었던 주류 박람회 스케치를 들으니 어떤 분위기인지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컨텐츠는 술인데, 체험 방식은 박물관/미술관처럼 계속 서서 걸어다녀야 한다니 많이 빡세네요. 맛보고 입맛에 맞는 술을 언젠가 골라보고 싶군요. (다른 건 모르겠고 와인 종류가 탐 납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