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19 14:58
이 집은 감나무 집이라고 불렸던 한옥이었습니다.
경주나 전주 같은 곳에 가면 있는 진짜 기와와 전체를 통나무들로 서까래를 인 그런 집은 아니고 방, 마루, 방, 부엌의 일자 구조에 방 양면에 미다지 문, 중간의 마루 천장은 나무 서까래를 하고 있어 한옥 느낌을 풍부하게 내는 약식 한옥이었습니다. 이쯤 쓰다 보니 저의 보호자들은 이사를 다니는 김에 다양한 주거 양식을 맛보려는 의도가 있었나 새삼 궁금해지네요. 더울 땐 마루를 뒹구는 것도 좋고 평상에서 점심을 먹기도 좋아서 괜찮았지만(감나무에서 송충이 떨어지는 것만 조심) 겨울엔 너무 추웠던 기억이 납니다. 사면의 벽 중에 두 벽이 문이니까요. 그것도 틈틈이 바람이 스며드는 미다지 문.
이 집은 대문을 열면 정면에 한 채, 좌우로 한 채 씩 해서 비슷한 구조로 된 세 채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마당 이쪽저쪽 구석 큰 감나무가 두 그루 있었어요. 그래서 동네에선 감나무 집이라고 가리켰는데 시골도 아닌 지역에서 굳이 그런 이름을 붙여 부를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만 누군가 이 집을 물어가며 찾아오기도 했거든요. '근처에 오면 감나무 집이 어디냐고 물어'라고 일러 두지 않았을까 싶네요.
이 집은 집 주인이 따로 있고 세 가구가 다 세입자였습니다. 세 채 중 대문에서 정면의 집에 우리가 살고 오른 쪽엔 마흔 중반의 여성이, 왼 쪽엔 부부가 살았습니다. 오른 쪽에 사는 마흔 중반 여성의 직업이 사교춤 선생이었어요. 교습소는 자신의 방이었고요. 간판 같은 건 당연히 없었는데 알음알음으로 연결되어 찾아오는 것이었죠. 이분의 집은 방 사이의 벽(문짝)을 다 쳐내고 마루까지 포함한 길쭉한 형태로 마당 쪽으로만 미다지 문들이 세 개 있었습니다.
오후부터 시작되면 저녁 늦게까지 댄스연습이 계속되었습니다. 전축에서 나오는 음악소리와 전등을 색깔 조명으로 빙글빙글 도는 걸로 달아서 사람들의 그림자가 문짝에 어른거리곤 했습니다. 커튼을 쳐서인지 그다지 시끄럽지는 않았어요. 춤 교습인지 모임인지가 매일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방문을 닫고 tv를 보고 있으면 다른 채에서 벌어지는 춤판이 의식되진 않았습니다. 저는 그랬습니다.....만 나머지 집 사람들은(어른들) 점점 불안에 싸이고 불만이 치솟았습니다.
모임이 있는 날이다 싶어지면 저의 보호자들은 저녁 먹고부터 방에서 나가지 마라고 했지만 그래도 화장실은 가야 했어요. 애(나)한테 좋지 않다 비슷한 말도 오가고요. 저도 알긴 했습니다. 잡지에서 무슨 춤바람 어쩌구라며 머리에 옷을 뒤집어 쓴 채 찍힌 여자들 사진을 봤거든요.(흥, 그저 여자들을 집에 붙잡아 두려고 말이죠)
댄스 모임이 있는 날엔 여자 몇 명과 양복 입은 남자들이 몇 명 오고 아마도 춤 사이에 갈증을 달랠 맥주도 마시게 되고 그러다 보면 화장실 출입이 잦아지잖아요. 다른 집 사람들의 확실한 불편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외간 남자들의 화장실 출입으로인한 불편, 불쾌감. 다음날 선생이 물청소를 하곤 했으나 알코올로 생긴 냄새까지 씻어내진 못했으니까요.
이집 저집 사이에 다툼이 생기기 시작했고 날은 점점 따뜻해졌습니다. 춤을 추면 안그래도 더운데 봄이 되니 문을 꽉 닫고 출 수는 없었고 문을 여니 다른 집에서 드디어 집 주인에게 연락을 하게 되었나 봅니다. 이하 생략. 짐작하실 수 있는 전개가 되겠습니다.
우리는 한을 들먹이는 만큼이나 신명의 민족이라는, 춤과 노래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얘길하는데 남녀대중이 짝을 이루어 추는 사교댄스는 오랫동안 미풍양속을 해친다며 백안시되었었죠. 발레도 남녀가 짝을 이루어 추는데, 게다가 다리는 다 내놓고! 어째서 사교댄스의 짝지은 춤은 그렇게 싫어하고 혼자서 몸부림 치는(?) 막춤만 춰야 하는 걸까요. 요즘은 사정이 조금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지만... 저만 모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사교댄스 배울 의향 있으신가요.ㅎㅎ)
2023.04.19 18:05
2023.04.19 20:30
그런 추억이 있으시군요. 사교댄스의 묘미는 낯모르는 사람들이 만나 댄스를 통해 사교하는 거 아닙니까? ㅎㅎ
사실 밝고 건강한 사교댄스 문화가 정착되었다 하더라도 저도 취향이 아닙니다. 남의 체취가 큰 장벽이기도 하고요.
요즘은 스포츠 댄스라고 하는 것 같은데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네요.
2023.04.20 11:06
아 이 일화도 너무 재미있군요 ㅋㅋ
2023.04.19 19:44
검색해보니 한지붕세가족이 1986년에 했었군요...
저도 세 가구, 네 가구까지 같이 살아봤어요.
2023.04.19 20:33
아파트 생활 이전엔 도시 서민들의 흔한 주거 모습이었죠.
저는 어릴 때 집안 여건상 이사를 많이 다녔거든요.
2023.04.19 22:42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제가 편하게 여겨졌는지 자신이 수십년전 사교댄스를 배우고 춤을추다 연애?불륜?하게된 얘기를 해주셔서 사교댄스에 별로 좋은 느낌이 안들어요 흑. 사랑은 위대한 건데
2023.04.20 09:52
같이 춤을 춘다는 건 일단 호흡을 맞추어야 되거등요? 백 마디 말보다 두 사람을 묶어버리는 힘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과거 정부들이 무척 위험하게 봤던.
2023.04.19 22:53
사교댄스가 비교적 건전한 대중 교양이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아요. 50년대생 아버지 형제분들이 대부분 사교댄스 스텝을 밟으실 줄 알더라고요. 아마 대학 써클 등에서 배웠던 게 아닐지? 정작 그 윗대인 할아버지는 사교댄스 배우러 다니다가 이러다 춤바람 나면 교사 체면에 동네 망신이다 싶어서 스스로 그만둔 전적이 있으신 거 보니 시대에 따라 이미지가 달랐던 것 같기도.
2023.04.20 09:55
오 맞아요. 스텝을 밟는다는 표현을 쓰지요. 한 스텝 밟아 보실까요? 이러면서 춤을 청하던...뭔가 배워 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저도 막춤은 좀 추지만(사실입니다) 이런 춤은 배운적이 없네요. 고등 학교 다닐 때 반별 민속무용 경연대회 때 무용 샘에게 조금 배운 기억은 납니다.
2023.04.20 11:10
맞네요. 영화 [클래식]에서도 사교 댄스를 학교 교과과정에서 가르치기도 했으니까요.
2023.04.20 11:16
시대 고증이 안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난영씨의 노래라도 틀어놓고 읽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어쩜 이렇게 다채로운 유년기를 보내셨는지요. thoma님의 보호자분들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당시는 힘드셨겠지만 그래도 독자에게는 무척 풍요로운 이야깃거리들이 이렇게 만들어졌군요. 읽는데 무척 즐겁습니다. 제가 이렇게 살았었던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네요...
2023.04.20 13:33
흐흐 이것은 가요무대 등에 나오면 우리 할머니가 즐겨 들으시던.
혹시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읽으셨다면 그 시기와는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은희경도 저보다는 윗 연배이지만 저는 소설을 읽으며 이 감나무 집이 떠올랐었네요.
2023.04.21 12:32
저 역시 춤바람이 제일 먼저 떠오르긴 합니다. 왜 그렇게 음성적인 인식이 박혔는지, 모든 재미난 것을 부정적으로 보던 당시 분위기가 범인 같긴 합니다.
저희 이웃엔 양장점 하시는 모녀가 살아서 양장점 분위기 물씬한 '바바리'와 '나팔바지'를 얻어 입었었죠.
집 이야기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글 써주신 데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염치없이 더 좀 부탁드릴게요.ㅎㅎ
2023.04.21 14:57
마음먹으면 배우기가 어렵지 않아서 누구나 해볼만한 커플댄스니 불미스러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안 좋은 이미지를 씌운 측면도 있지 않을까요.
바바리를 소화하셨다니 부럽습니다. 입고 싶은 옷인데 저한테는 안 어울리더라고요.(바바리가 버버리인지 다 커서 알았네요.ㅎㅎ)
별 글 아닌데 감사는요. 읽어 주셔서 제가 감사해요. 집이 아직 있긴 하지만(?) 조금 주저가 되네요.
2023.04.21 14:27
아니 어린 시절이 왜 이리 버라이어티하셨죠.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무슨 옛날 배경의 고풍스런 성장 소설 읽는 기분이에요. ㅋㅋ
2023.04.21 15:00
하하하, 아파트 키드들은 따라올 수 없는 경험이죠. 제가 조금 도시의 장돌뱅이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니까 1980년대 강남 아파트에 살 때, 부모님과 부부 동반 모임을 하던 5~6커플이 사교댄스를 배우겠다고 남자 강사를 초청해서 우리집에서 강습을 받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봐온 아저씨 아줌마인 중년남녀가 촌스러운 음악에 맞추어 쌍쌍이 춤추는게 하나도 세련되지 않고 우습게만 보였어요. 이 강사는 커플들 연습을 시키면서 주변에 얼쩡대던 저에게도 가르쳐주려고 했는데요. 이 느끼한 아저씨한테 얼마나 입냄새가 나던지 저는 틈을 노려서 방으로 도망가 버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