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31 22:47
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이 요르고스 란티모스를 다루는군요. 그걸 한 4분쯤 보다가 멈추고 갑자기 든 생각을 끄적여야 할 것 같아서 연속으로 글을 써요 ㅋ
이 감독의 작품을 총 네편, <송곳니>, <더 랍스터>, <더 페이버릿>, <킬링 디어> 보았어요. 그리고 작품들에는 하나같이 금기가 작동하죠. 뭔가를 하면 절대 안됩니다. 규칙을 어기면 안됩니다. <킬링 디어>는 이 금기를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죠.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내리는 신벌을 받아라. 그런데 이걸 살짝만 옮기면 굉장한 코메디가 됩니다. 왜냐하면 금기에는 금기 나름대로의 논리나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금기의 방향이 잘못 설정되면 금기는 금기로서의 의미를 잃고 그냥 찍어누르는 힘만 작동하니까요. <더 랍스터>도 되게 황당한 영화죠. 아니 왜 45일 안에 커플이 되어야 합니까. 그런데 금기는 절대적이어서 사람들은 거기에 진지해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커플이 안되면 돼지가 되니까요. <송곳니>는 그런 금기의 힘과 목적이 적절히 어우러졌던 블랙코메디였던 것 같아요. 절대 집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금기를 세워놓고 아이들을 자기 멋대로 교육시킨다는 이 미친 가부장제는 그 자체로 국가와 독재의 방식을 은유하는 동시에 그 금기가 적용되는 부분들이 정말 시시하고 황당하니까 또 웃긴 거죠. 물론 섹스 씬들은 정말 끔찍하지만요.
<더 페이버릿>은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오히려 금기에서 힘과 목적 모두를 덜어내고 찍었던 영화 같아요. <더 랍스터>처럼 누군가와 짝이 되는 게 목적이고 그 금기에의 충성이 풍자하는 것은 <송곳니>처럼 국가권력입니다. 그런데 시시한 목적과 절대적인 힘이죠. 이 두가지를 섞어놓으니까 세상 웃기고 지저분한 세계가 되면서 국가와 그 운영자들이 세상 웃기지도 않는 인간들이 됩니다. 궁중암투라 하면 촛불이 일렁거리는 가운데 심각한 얼굴의 관료들이 어쩌구 저쩌구를 조용히 늘어놓다가 없애버리죠! 하고 누군가를 죽이는 결단이 이어지게 마련인데 이 영화에서는 촛불이 일렁거릴때 레즈비언들의 애정행각이 펼쳐지잖아요. 어떻게 보면 여성간의 섹스와 성 그 자체를 아주 저속하게 다루면서 "그리하여, 그 날밤 여왕은 빠구리를 떴다" 같은 진지한 나레이션을 영화 내내 말하는 느낌이죠. 국가는 어떻게 운영되는가. 여왕폐하에게 누가 더 정성스레 커닐링구스를 해주는가에 따라 국운이 결정된다 이런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고 남자들은 뭐 다르냐면 오히려 더 발정나있고 한심한 멍청이들이죠.
<더 페이버릿>의 엔딩은 정말 역겨웠습니다. 사랑이라는 표피를 뒤집어 쓴 금기의 목적이 완성되자 결국 그 관계에서 허울이 떨어지고 오로지 금기의 절대적인 힘만이 남아서 작동하죠. 앤이 에비게일의 머리를 붙잡고 자신의 다리를 만지게 하는 그 장면은 영락없이 강간입니다. 다만 남성기만 빠져있을 뿐이죠. 금기를 초월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에비게일이 그 절대적 힘에 굴복해서 억지로 다리를 만지는 동안 토끼들이 오버랩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참 연약하고 시시한 동물들과 자신을 겹쳐보았던 걸까요. 혹은 자신도 애완동물의 처지로 전락했다는 걸 깨달았을까요. 아니면 귀여운 토끼들을 떠올리면서 억지로 현실을 잊으려 한 것일까요. <송곳니>의 결말만큼이나 찝찝합니다. 앤은 계속 그렇게 우울하고 총애를 거둔 채로 에비게일을 도구로 삼을 테고, 에비게일은 권력쟁취의 기쁨을 더는 누리지 못할 테고요. <더 페이버릿>은 기존의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들과 순서를 거꾸로 가는 것 같아요. 절대적인 금기가 세워져있고 거기에 적응하거나 부적응해나가는 인간들을 그렸다면, 이 영화는 마지막에서야 금기가 제대로 세워지고 거기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그리고 있으니까요.
2019.03.31 23:35
2019.03.31 23:47
영화 전문 모팟캐에서 <페이버릿>에 대해 이런 평을 하더군요. 기존의 사극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역사 그대로, 여왕과 비선실세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그냥저냥 평범한 사극이 되었을텐데, 이 영화는 그런 기존의 구도를 과감히 깨버린다는 겁니다. 여걸들의 왕좌의 게임 대신, 그냥 진짜' 여자들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런 기존의 사극이 그리는 권력투쟁 이야기는 그저 남자에서 여자로 성만 바뀌었을 뿐, 이제는 너무 많아 식상하기 그지없는 정쟁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라는 겁니다. 대신 여자들은 적당히, 남자들은 완전 망가지면서 - 사극이되 영웅이 없는 - 지극히 현실적인, 여자들만의 이야기를 그려나갈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여자들의 이야기가 마냥 아름답게만 미감이 되어있지 않고, 정말 인간관계의 비루함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네요. 진짜 곱씹어 볼수록 생각할게 많은 영화입니다.
2019.04.01 05:42
<영화당>은 한번도 안 접해서 모르지만 (이동진의 평은 믿고 거르는 터라... -_-), 며칠 전 구독하는 팟캐스트에서 <킬링 디어>를 다루는 걸 듣고 흐뭇하던 참이에요. 좋아하는 감독이라 안 본 <페이버릿>을 찾아볼까 하던 참인데 이 글이 뙇! ㅋ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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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버릿>에 대한 평에 절대 동감합니다. 저도 그 마지막 장면 때문에 어찌나 충격을 받았던지, 순간 정신이 멍해지더군요. 특히 영화 끝나고 나서 옆에 앉은 친구에게 뭔 소리를 들을지 몰라서 순간 쫄았…그런데 오히려 그런 비정하고 역겨울 정도의 혐오스런 묘사가 영화가 가진 메세지에 힘을 더해주는 건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괜찮은 영화구나 싶더군요. 제 친구도 영화 괜찮았다면서 제가 눈치보고 있었던 것 때문에 한참을 웃더라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