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더빙이 필요해

2019.03.30 11:50

흙파먹어요 조회 수:797

사냥터에서 얻은 것이라곤 상처뿐인 몸으로, 혹은 빈 바구니의 섭섭함에 한숨이 담겨 무거워진 어깨로,
우리의 조상들은 저마다의 동굴, 움집으로 돌아와 서러움 달래려 모닥불을 댕겼습니다.
"순돌이네 아부지는 맷돼지도 척척 잘만 잡아온다는데, 어떤 년은 서방복이 터져 허구한 날 족제비 신세여!!" 

돌아누운 등 뒤에서 날아드는 마누라 등쌀.
"계집년이 사냥은 뭔 놈의 사냥이여! 곱게 떨어진 밤이나 줍다가 시집이나 가!" 
부락에서 제일 가는 돌팔매질 실력을 가졌지만 바구니나 메고 다니는 신세가 서러워 고개 파묻은 순희.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1만 년.
뜻대로 되지 않아 서러운 인생, 밤하늘 바라보며 한숨 뿌리기는 그 핏줄 이어받은 자손들의 숙명이라.
우리는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와 헛헛한 마음으로 매일 작은 모닥불 하나 피워댑니다.
어두운 거실에 주저 앉은 윤호, 혹은 주희. 친구, 부모, 선배.. 살면서 좋든 싫든 그 많은 관계가 낙엽처럼 쌓여왔지만,
때때로 진심으로 위로가 되는 것은 나와는 전혀 상관 없이 혼자 타오르는 저 모닥불이더라는 겁니다.

그저 하나의 불꽃에 불과하지만, 그걸 너무 잘 알고는 있지만
타닥 타닥 소리 내며 춤추는 불꽃에 내가 놓친 사랑이 있고, 가지고 싶었던 우정이 있고, 이루고 싶었던 승리의 기쁨이 있는 신비.

당장 엄마가 아픈데 병원비가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것은 아닌 이상,
그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눈물 또 한 번 꾹 참고 내일을 향해 그런대로 잘 흘러가게 되는 힘을 얻게 되는.

남의 사랑으로 내 고독이 어루만져지고, 남의 스펙타클로 나의 어제와 같은 내일이 달래지는 꽤나 나쁘지 않은 쓰다듬.
그 얼굴을 희번득하게 비추는 모닥불에는 왜인지 한 단어 붉은 글씨가 씌어져 있는데요. 뭘까요?
아... 넷플릭스라고 써 있네요.
제가 매일 피우는 불에는 푹이라는 퍼런 글자가 써 있습니다. 제가 한드를 좋아해서..

저는 총칭 티비를 보지 않습니다.
매일 같은 드라마를 그냥 틀어놓고는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버리기에는 애매하게 구멍난 양말을 꿰매며
모닥불처럼 생활의 벗으로 삼아 티비를 귀로 들어요.
그렇게 드라마 <연애시대>를 한 5년 피워댔더니 이제는 은호와 동진이가 친구 같아져 버렸어요.
제가 연애시대를 백 번 봤다는 말은 거짓이지만, 그래서 또한 아주 허풍만은 아닌 것이지요.

듀게에 재주 좋으신 분들 많아 영문 기사도 긁어다 올리고, 자막 없이 영화 본다는 분도 계시던데.
저는 그냥 보통의 인간이라 영어는 일 할 때나 쓰는 스패너 같은 거에 불과하고,
자막 보는 게 힘들어서 외화는 가급적 집에서 다운 받아 봅니다. 화면이 작으니까 한 눈에 화면과 대사가 다 들어오거든요.

해서, 영화나 드라마를 모닥불처럼 쓰는 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옛날처럼 성우들의 더빙이 들어 간 콘텐츠가 유통이 되면 좋겠습니다.
틀어놓고 뭐 하기 좋은 영화들, 가령 워킹 타이틀의 영화랄지, 혹은 워킹 타이틀의 영화랄지, 아니라면 워킹 타이틀의 영화랄지...
바닥에 엎드려 물티슈로 거실을 닦다가 성우들이 해주는 대사에 좀 ㅎㅎㅎㅎ 맥 없이 웃어나 보게요.

전에 제기동에 갔다가 아무리 봐도 인도인인 아저씨가 과일 가게에서 장사를 하는 걸 봤습니다.
아저씨는 그 혼잡한 와중에 너무 능숙한 한국어로 "아유 어머님 드릴게 드릴게 잠깐만 기다리셔"라고 말을 하셨어요.
그렇게 말이 완벽하게 통하니, 그곳에서는 피부색도 국적도 외노자니 뭐니 하는 차별도 아예 없었습니다
와.. 말이 통한다는 게 저렇게 위대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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