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독일인의 한국어 수준

2019.03.28 05:48

어디로갈까 조회 수:1901

1. 어제, 여러 차례 진행된 상대 회사와의 미팅이 끝난 후 dpf가 우리말로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그들은 정말 덛덛다."
(주: 회사에서의 공용어는 영어고, 제가 독일어를 아니까 그가 심각할 때 쓰는 혼잣말을 수렴하는 정도고, 그가 장난/애교용으로 쓰는 한국어의 수준에 가끔 놀라는 배경.) 
저는 처음에 '덛덛다'를 '떳떳하다'로 알아 듣곤 그의 감정의 맥락이 뭘까 갸우뚱했습니다. 근데 세세히 물어보니, 그가 사용한 건 조선초기의 우리말 '덛덛다'였어요.
덛덛다: adj 늘 그러하다. 변함없이 같다.

제가 우리말에 무심하지 않은 편인데, 난생 처음 접한 우리말이었습니다. 더 기가막혔던 건 제가 놀라서 한 질문에 답한 그의 이 말이었어요.
"한국어는 배울수록 '뜻'과 '청각' 사이의 연결이 체험되는 재미가 있는 언어야. '헛헛하다'는 단어는 그 말을 발음해봤을 때 그 헛헛함의 뜻을  만끽할 수 있었어." 
(꽈당)

2. 늦은 점심 겸  저녁을 같이 먹던 중 테이블 저편에서 뜬금없이 그가 한국어로 중얼거렸습니다.
"인간은 빵만으론 살 수 없어. 소시지가 든 빵이어야만 해."

평소에 그가 영어나 독일어로 그 말을 했다면, 삶의 필요조건을 고귀한 것으로 규정짓는 - 결정적인 가치를 제시하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을 거에요. 그러나 그의 우리말 실력에 살큼 놀란 뒤라, "실은 인간은 소시지가 든 빵만으로도 살 수 없지. 마실 것도 있어야 하지."라는 식으로 말장난을 이어나갈 수 없었습니다. 
뭔가를 배우는 사람에겐 배움의 입각점이란 것이 있는 거죠. dpf가 한국어에 입각하고 - 자리를 잡고 머물러- 있게 된 포인트가 뭘까 그게 궁금했어요.

3.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해봤어요. 
- 한국 시인/ 시 중에 좋아하는 게 있어?
"윤동주. 친구가 그의 시집을 선물했는데 <달같이>를 읽고 반했어.
- 호~ 그 시가 이해됐어?
"달이 수레바퀴처럼 돌면서 자라는 게 상상됐으니까 이해한 거지?"
- 하!

4. 달같이/ 윤동주 

年輪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하나 뻐근히
年輪처럼 피어 나간다.

5. 年輪: 
굴러가면서 자라고, 굴러가면서 피어나기도 하는 이 마술적인 수레바퀴의 의미를 그가 이해하다니. (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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