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잡담...(구찌, 스타워즈)

2017.12.24 06:04

여은성 조회 수:1275


 1.요즘 라스트 제다이를 욕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낙인찍기를 당하곤 해요. 스타워즈 골수팬이라던가 새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던가 설정덕후라던가 하는 낙인찍기요. 


 그런데 아니거든요. 솔직이 스타워즈에 감정이입할 수 있는 한국인이 얼마나 되겠어요? 시대적, 문화적, 지역적인 면에서 맞물려서 옛 스타워즈에 지나치게 심취해 있는 팬보이들은 찾으려고 해도 힘들걸요. 옛 스타워즈에 눈이 흐려져서 이 영화를 욕하는 게 아니라고요. 라스트 제다이 같은 쓰레기 영화를 까는 데 이유는 필요없어요. 이건 쓰레기 스타워즈 영화도 아닌 쓰레기 영화니까요. 



 2.요즘 구찌가 잘 나가고 있어요. 새로운 수석디자이너 때문이예요. 무언가를 몰락에서 구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몰락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너무 많이 바꿔버리면 


 '이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 거야? 테세우스의 배가 더이상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라고 누군가가 물어올 테니까요. 그렇다고 너무 바꾸지 않으면 또 다른 누군가는 '뭐야? 이건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일 뿐이잖아.'라고 비웃을 거고요. 뭐 미켈레는 구찌의 시그니처를 유지하면서 구찌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성공했지만요. 그리고 라스트 제다이는 이 사례의 정확히 반대죠.



 3.라스트 제다이는 '못 만든 스타워즈 영화'가 아니라 그냥 '못 만든 영화'예요. 이 영화가 스타워즈의 이름을 달고 나오지 않았다면 한 줌의 관심조차도 줄 필요가 없었겠죠. 


 가끔 축구팬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로날드 쿠에만이나 호마리우의 리그 시절을 본인이 직접 본 것처럼 이야기하며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이요. 하지만 그들이 그 선수들을 직접 봤을 리가 없잖아요? 보지도 않았으면서 감정이입하는 건 스놉질이죠.


 스타워즈 같은 것도 그래요. 위에 썼듯이 시대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맞물려 있지 않은 내가 스타워즈 팬이 될 수는 없어요. 실시간으로 당시의 붐을 체험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척을 한다면 그건 스놉질을 하는 거죠. 그래서 스타워즈는 나름 냉정하게 관찰할 수 있어요. 하지만 스타워즈에 냉정할 수 있는 사람이 봐도 라스트 제다이는 분노할 만한 참사예요.



 4.휴.



 5.이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됐을 때의 기분과 비슷한 거예요. 물론 사건의 스케일은 다르지만, 박근혜의 당선이나 라스트 제다이는 '고쳐쓸 수 없는 잘못된 역사'라는 공통점이 있거든요. 


 스타워즈는 기본적으로 SAGA형식이예요. 이건 그린랜턴이나 판타스틱4처럼 '이번 영화 별로던데? 무시하자.'하면서 없었던 일 취급을 할 수가 없다는 뜻이고요. 철도를 깔아버린 이상 다음 스타워즈도 그 다음 스타워즈도 이 철도를 무시하고 달릴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스타워즈의 철도'를 까는 작업은 신중해야만 하죠. 앞으로 나올 수많은 소설이나 게임, 서브스토리들은 이 철도를 따라가야만 하니까요.


 그 작업은 과감해도 좋고 신선해도 좋겠지만 어쨌든 프로다워야 해요. 아마추어적이어선 절대 안 되는 거예요. 



 6.왜냐면 그렇잖아요? 스타워즈는 수십년 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서 지켜져 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에피소드 123이 '못 만든 영화'일지언정 자식으로 인정은 받는 거고요. 아무리 못난 자식이어도 어쨌든 한 핏줄이 분명하다면, 그건 남이 아니거든요. 에피소드 123은 그런 영화 수준은 됐어요.


 그리고 디즈니는 이제 와서 스타워즈의 새 철도를 깔겠다고 선언했어요. 뭐 대단한 야심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요. 그렇기 때문에 스타워즈 신 3부작은 새로운 팬들의 것이기도 해야 하겠지만, 기존 팬들의 것이기도 해야 해요. 말 그대로 스타워즈 이름을 대고 신용 대출을 받은 거잖아요. 아파트를 사겠다고 담보 대출을 받은 다음에 그 돈을 아이돌 굿즈 사는 데 쓴다면 은행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러니까 이 상업 영화는 상업 영화다워야 해요. 무슨 예술 영화 만들듯이 나태한 난도질이 허용되어선 안 되죠. 각본가나 감독이 대충 질러보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상대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까를 끊임없이 분석하며 이야기를 전개해야 해요. 스타워즈는 그런 식으로 전개되어야만 하는 SAGA예요. 


 였어요.



 7.자꾸만 이게 새로운 시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기대와 예측의 문제예요. 예측 따윈 얼마든지 배신해도 되요. 그럴 역량만 있다면 이야기꾼이 우리의 예측을 배신해 주기를 우리는 늘 바라고 있죠. 왜냐면 우리가 못 하니까요. 그래서 돈을 주고 이야기꾼에게 그걸 맡기는 거고요. 돈을 많이 받는 이야기꾼이라면 예측은 배신하고 기대를 충족시켜야죠.


 하지만 재능은 없으면서 야심만 있는 이야기꾼이 상대의 예측을 부수기 위해 기대까지 박살내 버린다면 그 이야기꾼은 욕먹어야 돼요. 실력이 없으면 그냥 무난한 이야기를 하고 다음 이야기꾼에게 바통을 넘기면 되거든요. 재능이 없어서 실력이 없는 가엾은 이야기꾼을 누가 욕하겠어요? 그럴 실력도 없으면서 사람들을 놀래켜는 보고 싶어하는 이야기꾼이 문제인 거죠. 


 하지만 사람들을 놀래키는 것만이라면 광대라도 할 수 있거든요. 



 8.어떤 이야기든 그래요. 일정 이상 진행되면 그건 절대 크리에이터만의 것이 아니예요. 


 '이게 무슨 스타워즈 팬보이같은 소리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예요. 심지어는 2시간짜리 추리 영화만 해도 그렇잖아요? 처음 15분은 작가가 일방적으로 이야기 세계의 규칙을 정할 수 있어요. 어디로든 갈 수 있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작가의 운신의 폭은 좁아져요. 이제 이야기는 더 이상 작가만의 것이 아니거든요. 지금까지 풀어낸 모든 이야기와 규칙이 작가의 발목을 점점 옥죄어 오고 다음 번에 발을 내딛을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버리죠. 


 그리고 마지막 순간, 작가는 한 걸음에 갈 수 있지만 관객은 미처 예측할 수 없었던 어떤 바늘구멍을 뚫어내야만 하죠. 그 모든 과정이 말이 되어야만 하고요.



 9.두 시간짜리 팝콘 영화만 해도 이게 말이 되는 건지 아닌 건지, 돈을 내고 보러 온 관객에게 엄정한 판결을 받아야 해요. 그런데 이건 스타워즈잖아요? 감독이 던지는 한 수 한수가 SAGA의 역사로서 기록되는 이야기라고요. 그리고 그 작업을 제대로 해낸 건지 망쳐버린 건지는 평론가 몇 명이 감히 가르칠 수 없는 거예요. 보는 사람이 아는 거니까요. 


 예술 영화 따윈 상업 영화에 비하면 별거 아니예요. 자신이 떠들어대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잖아요. 실패해도 예술 영화니까 실패하는 거라고 자위할 수 있고요.


 그러나 상업 영화는 엄중한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진짜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돈'을 벌어야 하는 미션을 띄고 있으니까요. 수많은 사람들의 지갑을 열려면 이걸 볼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고 상상하고 분석한 후 그걸 한단계 뛰어넘는 데 성공해야 하죠. 그리고 스타워즈잖아요. 예산이 모자라다면 얼마든지 투입 가능한 영화예요. 설령 5억 달러를 써서라도 제대로 만들기만 하면 20억 달러를 회수할 수 있는 영화잖아요.



 10.그러나 이 빌어먹을 영화는 애초에 영화 자체가 문제예요. 스타워즈 영화치고 이상한 게 아니라 그냥 영화치고 이상하고 게으르다고요.


 주인공들이 미션을 해결하는 동안 위기에 몰리는 긴장감을 연출하기 위한 구도를 짜놓은 게 고작 저건가요? 큰 전함이 작은 전함을 몇 시간동안 따라가면서 딱총을 쏘는 거? 영화 내내 큰 전함이 작은 전함을 처리하려면 처리할 기회가 정말 많았어요. 


 그리고 중간의 카지노 신은 뭐죠? 어떤 사람들은 이게 그간의 스타워즈 클리셰를 깨부순 전개라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해요. 맙소사, 거인의 그림자를 벗어났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소중한 시간 몇십분을 낭비했다고요? 헐리우드 작가들은 이보다는 똑똑하잖아요! 이건 그냥 게으른 서브스토리예요.

 

 그리고 하이퍼스페이스로 적 함대는 박살내는 장면은...대체 뭐죠? 저런 편리한 방법이 있었다니. 왜 과거의 수많은 천재 제독들을 한순간에 바보로 만드는 거죠? 아니 그리고 왜 사람이 저기서 저러고 있는 거예요? 애초에 남아서 하는 것도 없던데. 쓰리피오한테 함을 맡기거나 하이퍼스페이스 공격을 맡기고 자기는 탈출하면 되잖아요? 옛것을 파괴하고 싶어한다면서 괜히 배에 남아 함께 침몰하는 선장 클리셰는 참 잘도 지키고 있어요.


 그냥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구성이나 구도, 캐릭터들의 행동이 총체적으로 바보스러운 거예요. 못 만든 스타워즈 영화가 아니라 그냥 못 만든 영화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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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워즈가 얼마나 중요한 영화인지는 상영시간이 말해주죠. 라스트 제다이의 러닝타임은 2시간 30분이라고요. 저스티스 리그 같은 초대작 영화조차도 회전률을 올려서 돈을 뽑아먹기 위해 2시간 남짓으로 편집을 당해요. 이딴 게으른 서사를 가지고서 2시간 30분으로 나온 것만 봐도, 스타워즈는 영화사 간부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영화인거죠. 스타워즈의 이름값이 아니었다면 이런 영화가 배짱 좋게 2시간 30분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까요?  


 라스트 제다이는 작품은 못 되어도 상품은 되어야 하는 영화였어요. 상품의 수준이라도 충족시키려면 시장조사와 소비자 분석이 필수고요. 작품을 만들 능력이 없는 감독은 주제를 알고 상품이라도 제대로 뽑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거든요. 그러나 감독은 주제를 모르고 날뛰었고 스타워즈 사가는 동력을 잃었어요. 레이나 렌따위가 어떻게 되든 말든 누가 신경쓰겠어요.


 왜 이렇게 단언하냐고요? 지금 인터넷에서 렌이 어떻게 될지 레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없잖아요? 적어도 깨어난 포스가 개봉한 후에는 다음 전개를 궁금해하는 사람, 자신의 예측력을 뽐내 보려는 사람들이 득실거렸어요.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안보이네요?


 스타워즈는 돈을 벌기 위해 거인의 어깨를 빌렸으면서 정작 그 거인을 이용할 줄도, 존중할 줄도 모르는 멍청한 영화예요. 위에 썼듯이 이게 그냥 SF영화라면 신경쓸 가치도 없어요. 2019년 후엔 아무도 언급하지 않을 영화니까요.


 하지만 그냥 내버려뒀으면 계속 지켜졌을 스타워즈 세계관과 팬들이 너무 가엾어요. 그들이 사랑하던 하나의 세계가 부서져버렸다는 사실이 너무 가엾어서 또다시 스타워즈 글을 쓰게 돼요. 


 이 영화가 하다못해 새로운 팬층이라도 챙겼을까요? 정말로? 이런 스토리와 이런 캐릭터, 이런 대사, 이런 구도, 이런 전개, 인상적일 것 하나 없는 비주얼, 평균 이하 수준의 각본을 가진 이 영화가? 


 또 못잤네요. 잠을 자러 수영장에 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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