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게시판에 글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지난 1월 20일.
저의 아버지께서 별세하셨습니다.
워낙 급작스럽게 떠나신지라...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 장례를 모시고 뒷마무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네요.

사실...
슬퍼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고 혼자 있는 시간이 좀 나게되니
이제서야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고 있네요.

거리를 걷다가
운전을 하다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도
문득 내가 숨쉬고 있는 세상에 더이상 아버지는 계시지 않다는 사실에
다 큰 어른이 눈물을 훔치게 되네요.

이번주 금요일이면 49재 입니다만
오늘에서야 갑자기 핸드폰에 저장되어있던 아버지의 전화번호를 삭제하려는 건
오늘 오전에 울린 카톡 알림 때문이었어요.
카톡 친구로...
아버지께서 등록되었더군요...

아버지께서 떠나신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의 핸드폰은 해지를 했습니다만
차마 제 핸드폰에 저장된 아버지의 번호를 삭제할 순 없었어요.
하지만 누군가 제 아버지의 번호를 받아서 개통을 하셨나봐요.
이제 놓아드릴 때가 되었나 봅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는 시골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계셨는데
5년전 심근경색으로 인해 스텐트 시술을 하셨습니다.
좁아진 관상동맥을 인위적으로 넓혀주는 시술이죠.

저는 그때부터 서울과 시골 두집 살림을 시작했더랬습니다.

어머니께서도 허리와 무릎이 좋지 않으셔서 예전처럼 포도 농사를 짓기 어려우셨고
아버지 역시 그리되다보니 두분께서 농사를 지으시는 건 불가능했어요.
애초에는 농장을 팔고 서울로 올라오시기를 권해드렸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짐이 되기 싫으시다며 고집을 부리시는 덕분에
제가 농사를 도와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저의 아버지는 고집이 강한 분이셨습니다.
저는 생전 처음 해보는 포도농사에 힘들고 서툴렀고
아버지와의 마찰도 많았어요.

2015년까지 그렇게 세월이 흘러 갔고요...
작년 2016년 3월.
제가 119에 실려 응급실을 가게되었습니다.
서울집에 있던 날이었는데...
급성 장출혈로 인해 피를 쏟다가 병원에 실려갔죠.
원인을 찾기위해 여러가지 검사를 하면서 여러번에 걸친 병원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사실은 포도농사의 시작 시점이예요.
한창 포도나무의 전지작업을 시작하고 농장 곳곳을 돌보기 시작할 때죠.
그 일 덕분에 저는 농사를 짓지 못했고
일흔 아홉 아버지께서 혼자 고생을 하셨어요.
물론 퇴원 후에도 아버지께서는 차마 제게 도와달라는 말씀을 못하셨어요.
저도 체력이 다 떨어져서 다시 회복하고 일을 다시 도와드리게 된 것은 여름이 다 되어서였죠.

그렇게 여름 한철 조금 농사를 도와드리고
작년 10월 중순에 저는 자전거를 타다가 교통사고로 또다시 119에 실려갔습니다.
왼쪽 어깨 견갑골이 골절되어 자전거는 커녕 농사일까지 완전히 못하게 되었죠.

이렇게 길게 주절주절 쓴 이유는...
아버지의 죽음이 제 탓으로만 느껴져서 그렇습니다...

10월 말부터는 포도농사의 마무리를 하게 됩니다.
포도나무 가전정 작업과 비닐 제거, 땅파고 비료주기, 농장 전체에 방풍망 두르기 등등
1년 농사의 마무리를 잘 해야 다음 해 농사를 또 지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전 사고로 인해 그 작업을 하나도 도와드리지 못했어요.
가뜩이나 심장이 안좋아서 스텐트 시술까지 하신 분인데
갑자기 혼자서 모든 일을 떠맡아 하게 되셨으니 얼마나 고생이셨을지...

그런 중에 제가 사고로 다친 어깨가 좀 더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작년 말에 알게 되었습니다.
사고 후 두달이 지나서야 MRI를 찍자고 해서 검사를 해봤는데
관절와순 파열 진단이 나오더군요.
담당 교수님은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면서
보험사와 마찰이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로 인해 아버지와 언성을 좀 높인 적이 있어요.

아버지는 나름대로 아들이 다친 것이 안타까워서 그러신 것인데
저는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버지께 서운함에 언성을 높혔더랬죠...

아버지와 마찰이 많았어도...
단 한번도 아버지께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땐 정말 제 몸이 아프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아버지께 저도 모르게 서운함을 드러냈더랬습니다.

그 일로 저도 아버지도 마음이 상해서 전화 통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설날에 만날테니까.
안좋은 일이 있었더라도 얼굴보고 나면 그냥 그렇게 마음풀고 전처럼 돌아가고...
저희 부자는 언제나 그랬거든요.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설을 일주일 남겨두고 집 마당에서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이...
119가 도착해서 심폐소생술을 시도할 당시 이미 늦은 상태였다더군요.

아버지의 일도 도와드리지 못했고...
보험사와의 마찰로 인해 엉뚱하게 아버지와 제가 언성을 높이고는 전화 통화도 하지 않은 채
아버지는 그렇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제 핸드폰의 최근기록에 저장된 아버지와의 마지막 통화.
12월 30일...
죄책감에 술없이는 잠들지 못하고 있는 나날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죄책감을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꿈만 같다는 게 정말 이런거였어요.
그냥... 오늘 눈을 감고 내일 일어나면 아버지께서 전화하셔서
내일 내려와서 일하자고 말씀하실 것만 같아요.
그래주셨으면...
꿈에서라도 좋으니 한번만이라도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어볼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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