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언제 처음 접한 게 언제였더라...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 중학생 때였나, 아무튼 꽤 어린 나이였던 걸로 기억해요.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엉겁결에 나란히 앉아서 보게 됐지요.

벌써 십수 년이 지난 기억이기도 하고, 또 그 나이대의 애가 보기엔 좀 충공깽한 장면도 많아서 그 날에 대한 기억 자체가 좀 흐릿한 편인데, 그 와중에도 지금까지 또렷이 기억나고, 또 마음에 드는 부분을 하나 꼽자면

어찌보면 만악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카리 유이' 캐릭터가 가진 의도였어요. 뭐 일단은 신지가 주인공이니까 서사의 흐름은 신지의 선택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만서도 사실 따지고 보면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결말을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인류가 사멸하든 지구가 개발살이 나든지 해도 영원히 초호기에 남아 인류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되겠다. 는 소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 셈이 되니까요.




1.

뜬금없는 근황 토크 하나.

뭐,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저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본명 외에도 몇 개인가의 별명을 갖게 됐는데, 그 중에서도 최근에 가장 많이 불리우는 별명은 '다람'이에요. 넵. 다람쥐의 그 다람이지요.

나이를 생각하면 가끔은 좀 머쓱해지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별명 자체는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어감도 나쁘지 않고, 생긴 게 닮았다(!)는 황송하리만치 감사한 이유에서 비롯된 거라 내심 기분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과연 칭찬...일까;

뭣보다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외모 말고도 꽤 닮은 구석이 많은 것 같거든요. 뭔가 꾸역꾸역 모으는 버릇이 있는 것도, 또 언제나 마음 둘 곳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결국엔 잊거나, 아니면 잃어버리거나 하는 것도요.




2.

뜬금없는 근황 토크 둘.

최근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오퍼가 들어와서, 어찌어찌 면접을 보고 또 합격해서 출근하게 됐습니다. 해당 업계에서만 놓고 보면 그렇게 좋은 조건은 아니지만, 뉴질랜드 가서 양털이나 깎으면서 살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참이라

실로 메데타시 메데타시. 향후 10 x n년치의 운을 모조리 다 써버린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초 나이스한 타이밍이었지요. 다만 최근엔 몸도 마음도 개점휴업 상태로 게으른 고양이마냥 살았더니 예열이 안 된 상태라 죽을 맛이지만요.

우야든둥 저와 가까운 지인들은 최근 몇 주 동안 거의 축제 분위기였어요. 정작 저는 뭐 하나 정해진 것 없을 때에도 아직까지는 초조함이나 불안감보다는 '내가 낸데 설마 굶어죽기라도 하겠어? 어떻게든 되것지.' 라는 근자감이 더 컸어서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꿀 같은 시간들을 흥청망청 쓰면서 살았는데, 취업 소식을 듣고 저렇게나 기뻐하고 축하해주는 걸 보니 그 동안 본의 아니게 여기저기 걱정을 끼쳤었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들고 좀 그랬네요.




3.

그런고로, 요즘은 여기저기로부터 정말 감사하게도 축하 선물을 받고 있어요. 제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거나, 혹은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을 때에는 단 한 가지의, 정말 심플한 원칙이 존재해요. 별 건 아니고, '먹는 건 안 돼.'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닳아 없어지는 건 안 돼.' 정도일까요. 모름지기 선물이라는 건 전달받는(하는) 순간뿐만 아니라, 그걸 볼 때마다 그 때의 마음, 나아가 그 사람을(혹은 저를) 기억할 수 있는 물건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선물받은 음식을 먹으면 그게 너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살이 되고...' 내지는 '열 아홉번째 생일날 xx누나가 사준 투쁠 치마살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ㅋ엉ㅋ'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어디엔가 있겠지만, 적어도 저는 그게 잘 안 되어서.... 쩝.

그래서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가까운 누군가가 생일 선물로 맛있는 걸 사주거나 하면 일단은 와구와구 먹으면서 "음 맛있네 일단 잘 먹을게! 근데 먹을 건 선물이 아니야.  딴 거 줘."라고 뻔뻔하게 말해버리거나, 

그것도 모자라 (제 기준으로) '보편타당한' 선물을 받고 나서도 그게 뭐가 됐든지 간에 받자마자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엄청나게 큰 목제 상자에 넣어둔 다음, 생각날 때마다 가끔씩 꺼내선 헤벌쭉 웃고 다시 고이 넣어 두곤 했어요.


다행히 요즘에는 요긴하게 쓰라고 선물해 준 걸 보관만 해놓는 것도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만큼 나이를 먹어서, 뭔가를 선물로 받게 되면 최대한 신주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하며 아껴서 쓰되, 알맹이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ㅡ패키지, 쇼핑백, 포장 리본, 더스트 백, 심지어 영수증까지ㅡ 예의 그 상자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어요. 뭐, 중요한 건 물건보다는 '상대방이 나를 아끼고 생각해주는 마음'이고, 그걸 저에게 상기시켜주는 매개물만 있으면 되는거라서요. 

뭔가 등신같은 논리라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이렇게 글로 풀어놓고 보니 두 배로 등신같아 보이지만 일단은 여기서 퉁. 하하하.




4.

어제도 아주 아주 좋은 명품 지갑을 선물로 받았는데, 생각이 흘러 흘러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어린 시절에 만든 아지트가 있던 곳에 잠시 들렀어요. 이사는 몇 번 했지만,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만큼의 오랜 시간을 한 동네에서 살아왔거든요.

해질녘까지 동네 애들이랑 한 발뛰기 하고 놀거나, 팽이치고 놀다가 쇠팽이 들고 온 애한테 데마이 쓰다 뽀록나면 손목 날아가분다고 겐세이 놓던 뭐 그런 시절에 살던 집 바로 앞에, 엄청나게 큰 유료 주차장이 하나 있었어요.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차라리 행보관이 애들 몇 데리고 공구리 치고 나라시 해서 작업해도 나은 수준의 퀄리티였던 걸로 기억해요. 당시에 얼마나 주차공간이 부족했으면 이런 곳도 장사가 되나 싶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곳이었는데

그게 꽤 짭짤했는지 어느 날 부지를 싹 갈아엎어서 절반은 리모델링하고, 나머지 절반은 빌딩을 올리기 시작하더라고요. 뭐 아무튼. 땅도 넓겠다, 놀이기구ㅡ각종 폐자재들ㅡ도 많겠다. 하니까 애들끼리 모여서 뚝딱뚝딱 만들었지요.

혹여나 다른 패거리들이 올까봐 한 명씩 비비탄 총을 들고 망도 보고 하면서 암호도 만들었어요. 암호는 '자갈치'. 뭐... 문어맛 과자가 맛있었나 보죠. 깊게 생각하면 지는 거니까.


뭐, 당연한 얘기겠지만 며칠 못 갔어요. 서로 죽고 못 사는 단짝들이여도 엄마가 "저녁 먹어라~" 하고 마법의 주문을 외우면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라, 못된 어른(...)들이 야음을 틈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박살내 버렸거든요.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 때 당시의 일기장엔 '내가 성공해서 꼭 그 땅을 사고 말겠어!!!' 라는 제법 조숙한 다짐이 씌어 있는데, 그 때 같이 놀던 애들이 어디서 뭘 하며 사는지도 모르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글쎄...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몇 번이나 비슷한 공간을 만들거나 찾아보려고 했지만, '준비된 개들' 멤버들이 모일 때 자주 가는 단골 술집 말고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게 없네요.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건 '그 날의 기억들을 추억으로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 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연애편지부터 생일 선물까지, 알밤 줍는 다람쥐처럼 이것저것 열심히 모아 둔 그 목제 상자가 저에게는 하나의 선언이자 서약과도 같은 거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나는 당신들을 잊지 않겠다.' 라는.

동시에 일종의 불신이자 강박이라는 느낌도 좀 있어요. 어차피 모든 관계는 영원하지 않으며, 기억조차도 뭔가를 남겨놓지 않으면 (심지어 저조차도) 잊어버릴 것 같다는 인식이 기저에 있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네요.

스아실 실제로도 그랬고요. 지금까지 십 년 이상 교류해왔고, 최소 향후 십 년 이상은 교분을 이어갈 이들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저한테 선물을 안 주더라고요. (...)



p.s. ...음 내일 출근 때문에 일단은 자고 아침에 마저 써야지... 하고 잠들었더니 글이 용두사미처럼 되어버렸군요.

뭔가 더 쓰거나 수정할 기력이 없는 관계로(...) 지금까지 끄적인 바낭의 서정과 잘 어울리는 듯한 노래나 한 곡 올리고 출근해야겠읍니다.

쓰다보니 꽤 장문의 글이 되었는데, 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섹시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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