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The Letter (1940)

2015.06.26 00:19

DJUNA 조회 수:3975


베티 데이비스는 W. 서머셋 몸과 합이 좋은 편이죠. [인간의 굴레]와 [편지] 모두 데이비스의 대표작인 동시에 가장 훌륭한 몸 원작 영화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인간의 굴레]도 할 말이 많은 영화지만, 오늘 다룰 영화는 윌리엄 와일러의 [편지]입니다.

[노처녀]와 마찬가지로 [편지]도 소설과 연극을 거쳐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몸의 단편소설을 작가가 직접 각색해서 무대에 올렸는데, 이것을 다시 영화로 만든 거죠. 이전에도 여러 나라에서 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다들 결정판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은 와일러의 영화입니다.

몸은 이 이야기의 아이디어를 쿠알라 룸푸르에서 일어난 실제 살인사건에서 얻었다고 해요. 영화에서 살인사건은 로버트 크로스비라는 영국인 농장주의 아내 레슬리가 제프 해몬드라는 남자를 총으로 쏴 죽인 것이죠. 레슬리는 해몬드가 자신을 성폭행하려고 했다고 진술합니다. 레슬리는 체포되지만 정당방위인 게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무죄판결을 받고 나가는 건 예정된 순서죠. 그런데 레슬리의 변호사인 하워드 조이스에게 이상한 소식이 들어옵니다. 레슬리가 살인사건이 일어난 날 해몬드에게 보낸 편지를 그의 혼혈인 아내가 갖고 있다는 것이죠.

결정판이라고는 했지만 완벽한 각색물은 아닙니다. 몸의 원작은 단편소설이라는 형식 안에서는 완벽해요. 하지만 연극과 영화로 넘어가면서 순수성을 조금씩 잃어가죠. 세 버전 모두 결말이 다른데, 영화 쪽이 가장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건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실력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할리우드 영화가 따를 수밖에 없었던 헤이즈 규약 때문이었죠. 이 규약에 따르면 살인과 같은 중대 범죄는 반드시 처벌되어야 해요. 그 처벌이 살인이라면 그 역시 처벌되어야 하고요. 그 때문에 영화의 결말은 여러 모로 인위적이고 군더더기처럼 보입니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원작에서는 해몬드의 중국인 정부로 설정된 캐릭터가 혼혈인 아내로 수정되었다는 것이죠. 지금 보면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인 태도잖아요. 원작 자체가 영국령 말레이시아의 영국인들 이야기이니 이들의 인종차별적인 태도가 대사나 태도에 녹아있는 건 당연하지만 그거랑 이건 사정이 다르죠. 하여간 원작과 영화가 동양인을 묘사하는 방식을 꼼꼼하게 비교하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결론만 내면 원작이 나아요. 몸이 이 단편을 쓰면서 어떤 입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범죄가 노골적인 인종혐오의 결과라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지요. 영화도 그 이야기를 안 하는 건 아닌데, 헤이즈 규약 때문에 수정된 대사와 설정 안에선 아무래도 힘이 날아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는 강렬한 영화입니다. 불쾌한 사람이 주인공인 불쾌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대부분 정곡을 찌르고 있죠. 아무리 핸디캡이 발에 걸린다고 해도 윌리엄 와일러는 훌륭하기 짝이 없는 장인이라, 장면마다 퀄리티가 다릅니다. 무엇보다 베티 데이비스가 레슬리라는 캐릭터를 지극히 베티 데이비스다운 연기로 살려내고 있어요.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일하는 최고의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훌륭한 기성품인 거죠. (15/06/26)

★★★☆

기타등등
해몬드 부인 역은 게일 손더가드라는 배우가 연기하고 있어요. 물론 혼혈이라 분장을 하고. 근데 이 배우는 46년에 [Anna and the King of Siam]에서도 옐로우 페이스 연기를 해서 오스카 후보에 오른 적 있어요. 그렇게 동양인처럼 생긴 배우는 아닌데.


감독: William Wyler, 배우: Bette Davis, Herbert Marshall, James Stephenson, Frieda Inescort, Gale Sondergaard, Bruce Lester, Elizabeth Inglis, Victor Sen Yung

IMDb http://www.imdb.com/title/tt0032701/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6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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