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지대전투 Battle of the Bulge (1965)

2015.01.23 23:39

DJUNA 조회 수:6893


제 기억이 맞다면 켄 아나킨의 [벌지대전투]는 초등학교 때인가에 [주말의 명화]인지, [명화극장]인지에서 틀어준 적 있었는데요. 월요일에 학교에 가보니 남자애들 절반 정도가 그 영화 이야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독일군 탱크와 독일군 장교로 나왔던 로버트 쇼에 넋이 나가 있었죠. [스타 워즈]를 보여주면 제국군에 들어가겠다고 난리 칠 놈들 같으니.

전 그 때 그 영화가 별로였고 지금도 그렇게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애들의 열광은 대충 이해가 갑니다. 네모난 배볼록 텔레비전이 아닌 제대로 된 와이드스크린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접한 관객들은 더 근사한 스펙터클을 체험했었겠죠. 아직도 많은 전쟁영화 팬들은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좋아해요. 하긴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 대규모 전차전을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보여주는 할리우드 영화는 별로 없었거든요. 요새도 없는 건 마찬가지. 얼마 전에 나왔던 [퓨리]도 스케일만 보면 참 조촐한 영화였지요.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아르덴 공방전, 벌지대전투로 알려진 실제 역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영화입니다. 단지 [지상 최대의 작전]식의 저널리스트적 접근법을 기대하시면 곤란해요. 당시 실제로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이 여기저기 언급되고 묘사되기도 하지만 이 영화의 역사적 사실성은 심지어 [명량]보다 떨어집니다. 실존 인물들은 거의 나오지 않고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역사적 사실들은 적당히 뒤틀려졌죠. 물론 탱크들도 가짜. 티거 2 대역으로 스페인군의 M47 패튼 전차가, 미군 셔먼은 M24 채피 경전차가 대신 나왔다죠. 하긴 진짜 2차 세계대전 당시 탱크들을 직접 끌어오는 건 당시엔 그냥 불가능했으니 이해가 됩니다. 아, 물론 당시의 기후나 지형이 전혀 반영이 안 되어 있기도 하고요. 더 궁금하시다면 직접 검색해보세요. 이런 건 밀덕들이 더 잘 알고, 이미 상당한 한국어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어 있으니까요.

엄청나게 뽀대나는 작품입니다. 와이드스크린이 그냥 길쭉하고 좁은 모양의 일반 스크린이 아니라 광대한 무언가였던 시절의 영화죠. 티거-2(인 척하는 M47 패튼 전차)를 몇 대씩 집어넣어도 여전히 화면이 휑하니 남을 정도입니다. 거대한 전쟁 기념 벽화 같아요.

보고 있으면 영화가 그 뽀대를 위해 독일군의 '멋있는' 이미지를 지나칠 정도로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실제 아르덴 공방전에 투여된 독일군들이 그렇게 멋지기만 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죠. 이 영화에서 가장 인기있는, 독일 전차병들이 [판저리트]를 부르는 장면도 그래요. 이 장면을 기억하는 관객들 중 그 노래를 부르는 군인들 상당수가 전쟁 경험이 형편없이 부족한 어린애들이라는 걸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마찬가지로 로버트 쇼가 연기한 마르틴 헤슬러는 필요 이상으로 멋있어졌습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전쟁광으로 그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런다고 그 캐릭터의 '멋짐'이 줄어드는 건 아니죠.

한 마디로 60년대에 만들어진 많은 전쟁대작들처럼 전쟁을 전쟁놀이처럼 그리는 영화입니다. 죽음과 고통은 최대한으로 축소되고 전차전과 같은 재미있는 것들이 부각되는 거죠. 허구의 인물들이 실제 인물들을 쫓아내고 모든 게 단순화된 스토리를 위해 재정리되자 영화는 더욱 놀이처럼 되었고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영화의 엑스트라 연기 지도는 정말 "장난하냐?"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지경입니다. 다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한심하게 죽어요. 춤추기 싫은 발레리나 같달까.

단순화된 영화의 스토리는 은근히 괴물 나오는 50년대 SF 호러 영화 같습니다. 독일군의 대공세를 예측하지만 계속 무시당하는 카일리 중령은 이런 영화의 단골 주인공인 과학자나 군인 같죠. 헤슬러가 이끄는 독일 전차 부대는 당연히 외계 괴물이고요. 이들의 공세를 막는 단순한 해결책도 그냥 괴물 영화에서 그대로 따온 것 같습니다. 역사물이 SF 호러를 닮은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죠. 하지만 실제 전쟁을 그린 역사 영화가 이 장르의 가장 단순화된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건 문제가 큰 거예요.

여전히 재미있긴 한 영화입니다. 전차전은 엄청 좋아하지만 고증에 그렇게 예민하지 않은 밀덕들에게 최적화된 영화랄까. 하지만 이 정도의 재미는 잘 만든 비디오 게임이라면 충분히 넘어설 수 있는 수준입니다. 오히려 게임 쪽이 더 생생하겠죠. (15/01/23)

★★☆

기타등등
아르덴 대공세를 그린 작품으로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바스토뉴] 에피소드가 [벌지대전투]보다 몇 백배 나은 거 같습니다. 탱크 한 대 안 나오고 한 시간 동안 불쌍한 의무병이 개고생하는 소박한 이야기지만요.


감독: Ken Annakin, 배우: Henry Fonda, Robert Shaw, Robert Ryan, Dana Andrews, George Montgomery, Pier Angeli, Charles Bronson, Telly Savalas, Werner Peters, Hans Christian Blech, 다른 제목: Battle of the Bulge, 발지대전투

IMDb http://www.imdb.com/title/tt0058947/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87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