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마이크 니콜스 Mike Nichols

주연
엠마 톰슨....비비안 베어링
Emma Thompson....Vivian Bearing
크리스토퍼 로이드....켈리키안 박사
Christopher Lloyd....Dr. Kelekian
아일린 앳킨스....E.M. 애쉬포드
Eileen Atkins....E.M. Ashford
오드라 맥도널드....수지 모나한
Audra McDonald....Susie Monahan
조나단 M. 우드워드....제이슨 포스너
Jonathan M. Woodward....Jason Posner
해롤드 핀터....비비안의 아버지
Harold Pinter....Vivian's Father
레베카 로리....비비안 (5살)
Rebecca Laurie....Vivian aged 5

1.

비비안

얼핏 생각하기에 'Wit(또는 'W;t')'는 난소암에 걸린 중년 여성의 투병기를 다룬 작품의 제목으로 그렇게까지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런 장르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과는 전혀 맞지 않죠. 모름지기 시한부 인생물이란 풍만한 감정으로 관객들의 누선을 자극하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유한한 삶의 가치에 대한 설교를 30분마다 한 번씩 던져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비비안 베어링은 판에 박은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기엔 너무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녀의 '똑똑함'은 단순한 지능지수에 대한 기술 이상의 것입니다. 저명한 영문학자 비비안에게 '위트'는 평생 동안 그녀가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연구 과제이기도 하니까요. 존 던 같은 남자를 연구하느라 평생을 바친 사람에게 '위트'가 삶의 방식으로 굳어지는 것처럼 당연한 일도 없겠지요.

그리고 그녀에게 닥친 일은 얼마나 존 던다운가요? 그녀는 난소암 말기 환자로 실험적인 약물 치료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을 뒤틀며 괴롭히는 것은 적인 암세포가 아니라 그녀의 암을 치유하기 위한 약물입니다. 지금까지 영문학자로서 책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이 책이 되어 암전문가들과 의대생에게 연구과제가 된 입장 역시 만만치 않은 일생의 반전이죠. 비비안의 마지막 이야기는 그녀가 습관적으로 읊어대는 존 던의 유명한 [홀리 소네트] 10번의 마지막 문장만큼이나 흥미로운 아이러니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는 비비안의 투병기를 다루면서 틈틈히 지난 50년 동안 비비안 베어링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여줍니다. 비어트릭스 포터의 그림책을 읽으면서 언어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어린 소녀가 천재적이지만 인간미 없고 냉정하기 짝이 없는 중년 학자가 되기까지의 모든 것을요.

이런 장르의 평균적인 작품들은 이쯤해서 이런 매정한 인물이 세상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여는 내용으로 급선회하기 마련이지만 비비안은 그렇게 성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에게 난소암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그녀의 육체는 평생을 연구해 왔던 주제가 육화되어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지요. 비비안도 다른 사람들처럼 고통받고 두려워하며 간호사 수지와의 관계를 통해 보다 단순하고 소박한 인간적 감정의 가치를 재인식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두뇌는 그녀가 마주친 형이상학적 패러독스를 무시할 만큼 '위트'를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를 더욱 감명깊게 만드는 것은 비비안의 이성적인 태도입니다. 비비안이 'verbal swordplay'를 포기하고 '친절함'과 같은 단순한 감정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녀가 이성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과의 대결에서 그녀를 승리로 이끄는 것은 Death의 대문자를 지우고 세미콜론을 코마로 바꾸어버리는 냉정한 이성입니다.

영화에는 말기 환자들을 실험용 쥐처럼 취급하는 의료 기관의 매정한 처사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 담겨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지나치게 매달릴 필요까지는 없을 겁니다. 암에 몰두한 젊은 의사 제이슨의 열정은 누구보다도 비비안 같은 사람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일테니까요. 비비안이 거둔 정신적 승리는 어떻게 보면 제이슨의 지적 열광과도 어느 정도 닿아있습니다.

2.

마이크 니콜스와 엠마 톰슨. 둘 중 한 명만 나와도 웬만한 극장용 영화를 끌어낼 수 있을만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감독하고 출연하고 공동 각본을 쓴 [위트]는 케이블 텔레비전용 영화입니다. 중년 여자가 암에 걸려 죽어가는 이야기로 떼돈을 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들과 퓰리처 상을 수상한 원작의 명성을 적절히 이용하면 아트 하우스 정도는 시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왜 곧장 케이블 텔레비전으로 직진한 것일까요?

제 의견을 말씀드릴까요? 그건 [위트]가 영화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트]의 원작은 퓰리처 상을 수상한 마가렛 에드슨의 히트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입니다. 이 작품은 고정된 무대 위에서 주인공 비비안이 직접 관객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짜여져 있지요.

이런 극장주의적인 형식은 영화와는 잘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영화에 맞게 스토리를 뜯어고치자니 원작 고유의 맛을 잃어버리게 되고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이크 니콜스와 엠마 톰슨은 정공법을 취했습니다. 비교적 덜 영화적이 되어도 원작의 맛을 살리기로 결정한 것이죠. 연극 속의 비비안이 관객들을 보고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영화 속의 비비안도 카메라를 직접 바라보며 그 너머에 있는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연극에서 그랬던 것처럼 비비안의 과거에 속해 있던 사람들은 현재의 병실로 자연스럽게 들어와 현재의 비비안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런 연극적 테크닉은 잉마르 베리만이나 우디 앨런과 같은 감독들에 의해 하나의 영화적 스타일로 굳어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위트]가 전적으로 영화적 자유를 찾은 것은 아닙니다. 1.85:1의 극장용 영화 화면 비율과 니콜스의 능란한 테크닉에도 불구하고 [위트]는 여전히 텔레비전용 연극 각색물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원작을 그대로 살린 것도 아닙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원래부터 말을 줄이는 경향이 있는 지라 원작의 많은 대사들은 잘려 나갔습니다. 아무리 원작을 살리려고 노력했다고 해도 영화와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연극적 장치들도 있는 법이라 이런 것들도 대충 가지치기를 할 수밖에 없었고요.

하지만 얻은 것도 있습니다. 무대에서 직접 비비안을 대면할 때 느낄 수 있었던 생생한 긴장은 어느 정도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카메라의 클로즈업은 그에 대응하는 친근함을 제공해줍니다. 연극 무대에서는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섬세한 사운드나 이미지의 조작, 작은 표정 연기 역시 원작 해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요. 연극이 묘사하기 어려운 증세의 사실적인 묘사 역시 장점입니다. 관객들이 영화라는 매체의 성격에 쓸데없이 매달리지 않는다면 [위트]는 여전히 강렬한 작품입니다.

3.

[위트]에 대한 글을 쓰면서 엠마 톰슨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그건 범죄에 가까운 일일 겁니다. 그만큼이나 [위트]에서 톰슨이 보여준 연기는 뛰어나고 톰슨이라는 배우의 성격에도 잘 맞습니다. 암으로 죽어가는 고통스러운 육체에 갇혀 있으면서도 날이 선 매서운 위트와 유머 감각을 과시하는 비비안 베어링은 정말 톰슨을 위한 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영화화하기엔 문제가 많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톰슨이 이처럼 각색에 매달린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01/10/01)

DJUNA

기타등등

엠마 톰슨이 낭송하는 [홀리 소네트] 10번을 듣고 싶으세요? 여기를 클릭하세요. 퀵타임 4.0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