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원신연

주연
채민서....수현
유선....지현
문수....기석

수현과 지현

지금 이 시점에서 가발을 공포영화 소재로 삼는 건 장르에 대한 농담처럼 보입니다. [링]이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뒤로, 긴 머리 유령은 장르 내에서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반복되었으니까요. 이런 때에 가발을 들고 나왔으니, 이건 작정하고 패러디를 만든다는 말과 같습니다.

영화는 지난 2년 동안 수없이 나왔던 [장화, 홍련]의 아류작이라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꽃발 날리는 벽지에서부터 지나칠 정도로 보호자처럼 구는 언니에 이르기까지, [장화, 홍련]에서 빌린 게 거의 분명한 부분들이 많으니까요.

영화는 이 뻔한 요소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글쎄요. 영화를 보는 동안 종종 감독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나도 긴 머리 귀신 컨셉이 진부하다는 건 알거든? 나도 이 장면의 인테리어 디자인이 [장화, 홍련]과 비슷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조금만 더 하게 놔 줄래?"

영화는 정말 조금 더 합니다. 실제로 [가발]의 이미지는 생각없이 긴 머리 귀신을 내세운 작년 영화들보다 훨씬 덜 진부합니다. 일단 이 영화에는 긴 머리 귀신이 거의 나오지 않거든요. 하긴 나오기도 힘든 게, 영화 내내 주인공들이 쓰고 나오니 깜짝 효과를 내기가 어렵지요. 오히려 영화는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이미지에 집중합니다. 백혈병 치료 때문에 머리를 밀어버린 여자의 모습 말이에요. 초반부에 꽃발 날리는 벽지들이 나오긴 하지만 이 역시 끊어진 탯줄처럼 중반에 사라져 버립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 유머가 부족한 침침한 영화가 작정하고 한 유일한 농담 같습니다.) 영화에서 자매의 관계도 [장화, 홍련]과는 다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백혈병 치료를 중단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동생 수현과 수현의 유리공예가 언니 지현입니다. 지현에게는 기석이라는 남자 친구가 있는데, 사이가 그렇게 잘 풀리는 편은 아니죠. 하여간 지현은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가발을 선물해주는데, 그 가발을 쓰자, 수현의 성격과 외모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잠시 가발을 빌려준 친구는 끔찍한 방식으로 자살해버리고요. 결국 지현은 자기가 산 가발이 저주받은 물건이라고 믿게 됩니다.

영화는 장르에 대한 의무감이 그렇게 엄격한 편이 아닙니다. [여고괴담 4: 목소리]가 고정된 장르 관습을 한 70 퍼센트 정도 버렸다면, 이 영화는 60 퍼센트 정도 버렸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이 영화에는 스토리와 무관한 여벌의 깜짝쇼는 거의 없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면 넣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심심해도 그냥 가는 거죠. 스타일에 대한 집착도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역시 필요하면 넣고, 필요하지 않으면 꼭 매달릴 필요는 없는 겁니다.

[가발]은 외부인이 만든 장르 작품입니다. 그건 이 작품에서 가끔 의무감 때문에 등장하는 공포장면들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실제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장르적 공포 장면들'은 영화의 다른 부분보다 덜 재미있습니다. 정말 하고 싶거나 마음 속에서 우러나서 하는 건 아닌 거죠.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부분은 관객들에게 자극을 주는 게 아니라 귀신들린 가발이라는 소재를 통해 두 자매의 위태로운 애정과 대립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영화는 꽤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장화, 홍련]과 어느 정도 차별화되기도 했고요. 거의 추상화된 수미와 수연의 관계와는 달리, 수현과 지현의 관계는 공포와 혐오, 이성애적 질시(이 표현은 조금 기만적이긴 합니다)로 얼룩져 있습니다. [장화, 홍련]의 비유를 조금 더 든다면 둘 다 계모를 반씩 나누어 가지고 있지요. 그 결과 영화는 초자연적인 핑계를 가지고 있는 심리 스릴러 비슷하게 됩니다.

영화가 사용하는 도구 역시 보다 보편적인 스릴러에 치우칩니다. 영화 초반에 지현이 사고로 목소리를 잃는 부분은 공포물의 도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설정이 사용되는 방식은 스릴러적이죠. 후반부의 파국에서도 초자연적인 방해 때문에 해결 불가능한 문제는 없습니다. 진짜로 끔찍한 일은 지상에서 지상의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집니다.

이 스릴러와 드라마는 괜찮습니다. 이야기가 완성되기 위해 요새 한국 호러 영화엔 의무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 같은 장황한 진상 설명을 거쳐야 하지만요. "극적 존재이유와 동기는 이해하겠지만 그래도 설마 저 사람이 저런 짓까지 해야겠어?"라는 생각이 드는 결말과 지나치게 깔끔하게 정리된 아이러니도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그래도 잘 만든 부분이 더 큽니다. 그렇게 완성된 드라마가 맘에 드느냐는 개인의 취향 문제겠지만요.

채민서와 유선도 충분히 자기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욕먹을 역들이죠. 그만큼 연기할 때 온 몸으로 뚫어야 할 난관이 많습니다. 이들의 연기는 충분히 알차면서도 디바식 자기 도취는 없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강한 가족유사성도 플러스 요인입니다.

[가발]은 정직한 영화입니다. 가식이나 인위적인 장치는 적으며, 드라마는 꽤 굵고 묵직합니다. 아마 장르팬들에겐 이게 단점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적어도 관객들로부터 꺅꺅거리는 비명을 끌어내는 영화는 아니니까요. 그러나 늘 하는 말이지만 비명만이 호러 장르의 유일한 목적은 아닙니다. 이 작품이 [장화, 홍련] 이후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아름답고 슬픈'이라는 표현에 어느 정도 부합되는 영화라는 점도 인정해야 하겠고요. (05/08/01)

DJUNA

기타등등

시사회에서 상영된 필름은 완성판이 아닙니다. 감독도 처음 봤다고 하고요. 이후로 약간의 재편집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가끔 지나치게 앞서 나오는 음악들도 어느 정도 삭제가 될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