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기형

주연
김규리....지오
박진희....소영
최세연....재이
윤지혜....정숙
이미연....허은영
이용녀....박기숙
박용수....오광구

파프리카 콘크리트 세면대, 때묻은 회벽, 조잡한 아그리파 석고상...

듀나 빌려입은 체육복...

파프리카 칼자국 난 책상, 닦여지지 않는 칠판의 분필 가루...

듀나 먼지나는 운동장...

파프리카 조회시간, 깜깜할 때까지 이어지던 자율 학습...

듀나 그리고 그리고... 흠...

파프리카 열의가 없군요?

듀나 물론 없죠. 왜 이런 걸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전 고등학교에 대한 환상도 향수도 악몽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었다고 해도 잊었고요. 왜 그런 걸 아직까지 머리 속에 박고 있어야 하나요?

파프리카 전혀 없어요? 그럼 [여고괴담]의 절반은 놓치면서 본 게 아닐까요?

듀나 이 나라 학교 일반이 어떤 모양이었는가에 대한 기억 정도는 남아있지요. 그리고 그 안에서 엉덩이를 비벼대며 모여있던 아이들이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알고요. 하지만 제 앞의 누구처럼 대걸레가 든 플라스틱 양동이를 보고 감상에 젖거나 하지는 않아요!

파프리카 감상에 젖은 것이 아니라 회상에 잠긴 거예요. 그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랍니다. 적어도 저한테 '나도 예전에는 저기에 있었다'라는 느낌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하여간 '학교'라는 주제는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15살 이상의 관객들 대부분에게 뼈 속까지 먹히는 주제가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잘 다듬어서 만들어내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여고괴담]의 가장 중요한 점은 상업 영화의 새로운 장르 가능성을 실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듀나 70년대에 부글거렸던 그 수많은 청춘영화들을 잊고 있군요.

파프리카 잊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영화들은 틴에이저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틴에이저를 대상으로 한 영화들이었습니다. 그런 영화들의 관객 범위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그런 소재가 가지고 있는 장르 가능성을 충분히 발전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80년대에 나왔던 몇몇 학교 비판 영화나 청소년 영화들은 분명 그것보다 발전한 것이었지만 그것들 역시 메시지와 질리도록 보아온 매너리즘 안에 갇혀서, 이 나라 학교 문화의 그늘 밑에서 자라온 풍요로운 문화의 요소들을 활용하지 못했어요.

듀나 그리고 [여고괴담]은 그 중 가장 큰 덩어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소위 도시 전설로서의 학교 괴담을 장르의 소재로 삼는 길을 열었다는 말이지요?

파프리카 대충 그런 말이죠, 뭐. 지금까지 그것들은 [토요 미스테리]나 납량 코미디의 소재로만 떠돌았지만, 잘 꾸미면 훨씬 나은 것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여고괴담]이 바로 그 증거지요. 나름대로 문화적 차별을 가한 장르를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되고요.

듀나 하지만 멀지도 않은 일본에도 그런 이야기는 수두룩 하지 않을까요? 제목인 [여고괴담]도 일본식에 가깝고요.

파프리카 적어도 우리와 그네들은 학교 문화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있으니 꼭 거기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매달릴 필요는 없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그 내용에 공감할 수 있는가일텐데, 저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꽤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듀나 공감 어쩌구를 떠나서, 과연 그 '풍요로운 학교 전설'이 얼마나 활용되었는지 의심해볼 만 하지 않을까요? [여고괴담]은 학교 전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학교 전설 풍의 이야기죠. 그런데 대부분의 도시 전설은 그림 동화와 같아서 호흡이 짧기 마련입니다. 이런 것들에 액션을 넣고 드라마를 추가해 길이를 늘이면 원래의 순수한 맛이 떨어지고 맙니다. 차라리 [캔디맨]에서 로즈와 바커가 그랬던 것처럼 학교 괴담 풍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학교 괴담의 존재 자체를 전면에 배치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파프리카 하지만 그 긴 길이는 어느 정도 당위성이 서 있어요. [여고괴담]은 아무 정보도 주지 않다가 갑자기 결정타를 날리는 '아직도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류의 이야기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습니다. 이미 관객들은 네 학생 중 한 명이 진주의 유령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으니까요. 대충 당위성이 선 다섯 명의 인물들이 적절하게 드라마를 형성하며 이야기를 끌어가니, 그들 중 누가 범인, 아니 유령일까 짐작하며 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죠. 이것은 오리지널 민담과 장편으로 늘인 현대판 민담의 차이가 아니라 단편 추리 소설과 장편 추리 소설의 차이라고 봐요.

듀나 물론 [여고괴담]은 오컬트를 끼워넣은 추리물입니다.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용의자가 배치되며 탐정이 나오고 나중에 사건이 해결되지요.

기본적인 스토리나 범인 설정과 같은 것들은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동기도 적절하고 범인의 위치도 미학적으로 적당하며...

파프리카 범인찾기가 너무 쉽지 않았을까요?

듀나 늘 오해받는 건데, 추리물에서 범인의 의외성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범인에게 적절한 동기를 주고 추적과정이 밋밋해지지 않게 숨어있는 위치를 배치하는 것입니다. [여고괴담]의 유령은 적당한 자리에 있습니다. 물론 조금 더 손을 보았더라면 효과가 더 살았겠지만 위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스토리가 아니라 디테일에 있습니다. 이 영화의 각본에는 기본 스토리에 지나치게 만족한 나머지 안이하게 처리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숨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관객들은 왜 진주의 유령이 '미친 개' 오광구 선생을 살해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적절한 동기를 부여한 스토리의 장점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의 심리 묘사가 적절한 순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정서적 흐름을 잃게 되고 말죠. 다시 말해 살인 동기를 머리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감정적으로 체험하는 데에는 약간의 곤란함을 겪는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여고괴담]의 시놉시스는 [여고괴담]의 대본보다 훨씬 좋아보이고, [여고괴담]의 대본은 완성된 영화 자체보다 훨씬 다양한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은영(이미연)이 관련되어 있는 장면들의 대부분은 문제가 많습니다. 은영은 소위 탐정이므로 어떻게든 적극적인 활약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은영은 뽕먹은 표정을 짓고 학교 주위를 방황하기만 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파프리카 은영이 낸시 드루처럼 적극적이면 모든 게 너무 쉬워지죠. 얼굴만 보면 진상이 밝혀지는 상황이잖아요.

듀나 자신이 신들린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지오의 에피소드 같은 걸 조금 더 살리면 그런 것 정도는 커버할 수 있어요. 은영이 풀어지면 스토리도 풀어집니다. 후반부가 그렇게 늘어진 것도 대부분 이 캐릭터를 그냥 방치해 두었기 때문이라고요.

파프리카 후반부에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죠.

듀나 많은 사람들이 '신파조'로 흐른 게 원인이라고 하는데,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애당초부터 이런 종류의 귀신 이야기는 신파이기 마련입니다. 원한 품은 귀신한테서 도대체 뭘 기대합니까? 프레디 크루거요?

신파인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오히려 한바탕의 한풀이는 이런 종류의 귀신 영화를 끝내기 위해 꼭 필요하죠. 하지만 그게 산만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클라이막스여야할 세 주인공의 대면은 심각합니다. 거기까지 가는 부분이 워낙 흐트러져 있고, 그걸 바로 잡기 위해 진주의 유령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일장 연설을 시켜야 할 판인데다가, 모두들 감정이 조절되지 않은 상황에서 할 말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원래 유령은 말이 많으면 분위기를 망치는 법입니다. 유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는 수다쟁이여도 상관없지만 초자연적인 존재가 되었으면 대충 말을 절제하는 편이 낫죠.

게다가 그 대사들 자체가 종종 위태롭습니다. 이런 영화일수록 대사의 사실성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대사들 중 몇몇은 굉장히 작위적입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플롯의 트릭과 구성에 봉사하는 것들이죠. 막판이 그렇게 어색했던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런 대사들이 몰려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영화의 장점과 단점은 대충 두 방향으로 갈리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학교 영화일 때는 그럭저럭 잘 넘어갑니다. 하지만 호러 영화/추리물로 갈 때는 덜컥거리기 시작해요. 특히 호러를 의도한 많은 부분에서, 감독은 프레디 크루거로 가야할지, 토종 귀신물로 가야할지, 자기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종종 영화 장면들이 이식되고 급조된 것처럼 보여요.

결국 장르의 경험 부족이 원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버텨온 국내 호러 영화의 전통이 잊혀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파프리카 저 역시 불만인 부분이 많았는데, 특히 음향이 그랬습니다. 음향 효과의 능동적 사용 자체는 발전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공포 효과를 내기 위한 전자 음향은 짜증이 났습니다. 그 음향이 영화 리듬의 완급을 완전히 망가뜨려놨기 때문입니다.

몇몇 의식적인 영화적 트릭도 성공적이지 못합니다. 지오가 '늙은 여우'의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까지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그 뒤를 스틸로 처리한 것은 필요없는 짓이었어요. 게다가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한 콩콩 귀신의 모습은... 글쎄요... :-)

듀나 정말 왜들 그 장면에서 그렇게 비명을 질러대는 건지!!!

파프리카 캐릭터의 배분과 배우들은 적절했다고 생각해요. 네 학생들 모두 기능적이기는 하지만 타당한 성격을 부여받고 있고, 행동도 믿을만하며, 캐스팅도 잘 되어 있습니다. 배우들이 딸리는 부분은 대부분 대사가 딸리는 부분이죠. 이 정도면 큰 무리는 없었다고 봅니다. 이미연이 연기한 은영이 좀 겉도는 듯 하지만 그 역시 대본 탓이라고 생각해요.

듀나 제가 아는 애들 중 정숙 역의 윤지혜랑 똑같이 생긴 애가 있어요. 영화보면서 쟤가 왜 저기 있나 했습니다. :-D

파프리카 그 영화의 무대인 모 여고에 대해서는 조금 알죠. 사실 그만한 무대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 영화 보면서도 정말 저런 일이 일어날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10여년 전만 해도 아침만 되면 애들을 먼지 털 듯 퍽퍽 때리는 소리가 교정에 음악처럼 메아리치곤 했죠.

듀나 저도 알아요. 요새도 애들 수학여행 보낼 때 그 죄수복 같은 하얀 체육복을 입히는지 모르겠네요.

대충 정리해볼까요? 솔직하게 말해, 전 이 영화가 꽤 많은 미덕을 가진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좋은 줄거리(각본이 아닙니다)와 적절한 배우들과 의욕 넘치는 감독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짜맞추어낸 결과는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서글프네요.

파프리카 완성도를 떠나서 전 이 영화를 꽤 좋게 보았습니다. 아마 제가 감상적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이런 종류의 호러/멜로/추리 짬뽕 스토리에 괜한 호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98/06/06)

D&P

기타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영화의 유령은 너무 물리적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야 이해할 수 있지만, 유령의 지나친 존재감은 스토리의 당위성을 심각하게 떨어뜨려요. 다행히도 속편인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이 문제점을 매끄럽게 극복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