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Akira Kurosawa

주연
미후네 도시로....와시즈 타케토리
Toshirô Mifune....Taketori Washizu
야마다 이수즈....와시즈 아사지
Isuzu Yamada....Lady Asaji Washizu
시무라 타카시....노리야스 오다구라
Takashi Shimura....Noriyasu Odagura
쿠보 아키라....미키 요시테루
Akira Kubo....Yoshiteru Miki
타키카와 히로시....츠즈키 쿠니마루
Hiroshi Tachikawa....Kunimaru Tsuzuki
치아키 미노루....미키 요시아키
Minoru Chiaki....Yoshiaki Miki
사사키 타카마루....츠즈키 쿠니하루
Takamaru Sasaki....Kuniharu Tsuzuki

와시즈의 최후

[거미집의 성]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훌륭한 [맥베스] 영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맞는 말일 거예요. 이 영화는 오슨 웰즈나 로만 폴란스키 버전을 능가할 정도로 순수한 영화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를 훌륭한 셰익스피어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뇨,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거예요.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 영화가 아니니까요. 셰익스피어의 문학에서 중요한 건 언어예요. 이 양반이 사용한 스토리들은 대부분 기성품이니, 스토리를 빌려왔다고 해서 셰익스피어 영화라고 할 수는 없죠. 단지 셰익스피어와 같은 소재를 다루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거예요. 물론 희곡의 구성도 조금 빌렸을 수 있겠지만요.

아마 구로사와 아키라가 웰즈나 폴란스키보다 우위에 서 있었다면, 그가 셰익스피어 영화가 아닌 [맥베스]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군요. 웰즈와 폴란스키의 영화는 어쩔 수 없이 텍스트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로사와는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그는 셰익스피어를 따르는 대신 셰익스피어와 1대1로 정면대결을 했습니다.

[거미집의 성]의 줄거리는 [맥베스]를 비교적 충실하게 따릅니다. 단지 무대를 중세 시대의 일본으로 옮겼지요. 전쟁에서 이기고 영주를 만나러 거미집의 성으로 돌아가던 와시즈와 미키는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원령을 만납니다. 원령으로부터 새 영주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와시즈는 결국 영주를 죽이게 되지요.

이야기는 같습니다. 영화의 음침한 분위기 역시 [맥베스]의 각색물에서 기대할 만한 것이고요. 하지만 [거미집의 성]과 [맥베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영화의 단순함입니다. [거미집의 성]은 원작의 복잡한 요소들을 가지치기하듯 잘라버렸습니다. 마녀 셋은 원령 하나로 대체되고, 예언의 수도 축소되는 식이지요. 덕택에 영화는 아주 빠릅니다. 원래 짧고 빨랐던 원작보다 훨씬 스피디하죠.

영화는 캐릭터의 복잡함 역시 잘라버렸습니다.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는 권력과 탐욕에 중독된 자들의 몰락을 보여주는 교훈적인 이야기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로 아주 입체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상상력이 풍부했고 자신이 어쩌다 말려든 입장에 대해 철학적 고민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맥베스 부부인 와시즈와 그의 아내 아사지는 완벽하게 평면적입니다. 그들의 고민과 행동은 초등학생이 학교 숙제로 짠 알고리듬처럼 단순합니다. 권력에 욕심이 나고 미래가 두려워 악업을 반복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영화는 원작의 깊이를 제거해버린 것일까요?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거미집의 성]은 [맥베스]의 각색물이 아니라 [맥베스]와 정면대결하는 영화니까요. 이 영화의 단순함엔 고유의 미덕이 있습니다. 캐릭터의 복잡함과 개성을 지워버리자, 주인공이 상대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감정의 힘과 주제가 더 커지고 강해진 것이죠.

그러는 동안 영화는 고유의 스타일을 발견해내기도 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일본 전통 연극양식인 노(能)의 영향입니다. 이 영화의 모든 대사들과 행동들은 마치 고도로 형식적인 연극처럼 양식화되어 있어요. 캐릭터들의 표정 연기 역시 과장된 가면같고요. 충성심과 탐욕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만화처럼 일그러진 와시즈의 얼굴과 그런 남편에게 살인을 재촉하는 아사지의 가면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비교해보세요. 네, 이들은 진짜 맥베스 부부의 입체적인 드라마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맥베스] 영화들도 결코 구로사와의 영화가 제공하는 추상적이고 정갈한 대립은 갖추고 있지는 못합니다.

[거미집의 성]은 [맥베스]라는 텍스트가 품고 있는 비주얼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뽑아낸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만큼 움직이는 버넘의 숲을 근사하게 묘사한 작품이 있던가요? 부하들의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와시즈의 거창한 최후는 정말 영화사에 길이 남을 죽음이 아닌가요? 진짜 [맥베스] 영화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이 영화는 훌륭한 공포물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관객들이 두 주인공들과 함께 유령들과 죄의식의 추격을 받는 안개와 숲의 미로입니다.

[거미집의 성]은 [이키루]나 [7인의 사무라이]처럼 관객들을 정서적으로 자극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그러기엔 영화가 너무 차갑고 냉정해요. 하지만 그것을 단점이라고 밀어붙이기도 어려우니, 이 영화의 미덕은 바로 그 차갑고 냉정한 형식미에 있으니 말입니다. (04/04/23)

DJUNA

기타등등

캐릭터가 완전히 제거되자, 아사지의 몽유병 장면이 조금 설득력을 잃긴 했습니다. 이 영화의 아사지는 캐릭터라기 보다는 와시즈를 지옥으로 몰고가는 탐욕과 공포 그 자체니까요. 하지만 [맥베스] 영화를 만들면서 그 장면을 뺄 수도 없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