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찬욱

주연
송강호....상현
김옥빈....태주
김해숙....라여사
신하균....강우
박인환....노신부
송영창....승대
오달수....영두
메르세데스 카브랄....이블린

태주와 상현

박찬욱이 뱀파이어가 된 신부 이야기를 영화로 구상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전 이 이야기로 과연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제가 뱀파이어 신부 영화를 많이 봤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그 개념부터 너무 안전하게 보였습니다.

[박쥐]가 거의 완성되고 홍보가 시작되었을 때, 전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영화의 기본 스토리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을 각색한 것이라고 하는군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주의사조의 문을 연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테레즈 라캥]은 기본적으로 이중적인 장르소설입니다. 살인범들의 심리를 다룬 범죄물이고, 귀신이 나오는 호러소설이지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분주한데 여기다가 뱀파이어 이야기를 더하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하러?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 전 이 아이디어들의 장르적 해법을 상상하려 시도했습니다. 답을 낼 수가 없더군요. 하지만 박찬욱은 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그 해법을 제가 상상할 수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결국 오늘 이 영화를 보면서 해법을 확인했는데요. 박찬욱 역시 모범 해답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전 장르 방정식의 측면에서 [박쥐]가 일종의 오답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굉장히 재미있는 오답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겠습니다. 신부인 상현은 아프리카의 모국가에서 생체실험에 자원했다가 죽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피를 수혈받고 부활합니다. 사람들은 그게 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뱀파이어가 된 것이었죠. 한국에 돌아온 그는 병원에서 어린 시절 친구인 강우를 만납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테레즈 라캥]입니다. 캐릭터들도 거의 같습니다. 마마보이 남편, 욕망에 굶주린 아내, 그런 아내와 불륜에 빠지는 남편의 친구. 친구와 아내는 결국 작당해서 남편을 죽입니다. 죽이는 방법도 거의 같습니다. 중후반까지 영화는 에밀 졸라 소설을 아주 충실하게 따라갑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뱀파이어 신부 이야기는 왜 넣었담? 고민되지 않을 수 없지요. 분명 상현이 뱀파이어가 되어서 굉장히 재미있는 코미디들이 나오긴 했습니다. 뱀파이어의 능력을 활용한 몇몇 장면은 정말 섹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스토리에 뱀파이어 신부가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중후반부에서 장르는 보다 적절한 해법을 찾습니다. 맨 마지막에 나올 결말이 갑자기 앞당겨지고 여기서부터는 보다 본격적인 장르물이 되는 것이죠. 그 이후로도 대충 [테레즈 라캥]의 이야기를 따라하고 있기는 한데, 원작에서 보다 자유롭습니다. 피가 흐르고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며 뱀파이어들은 보다 뱀파이어답습니다. 그리고 그게 끝까지 갑니다. 아, 그리고 정말 좋은 뱀파이어 영화 결말이 있답니다.

아주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박쥐]는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퀄리티 컨트롤에 가장 실패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시퀀스마다 문제가 발견됩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시퀀스 간의 연결성이 나쁘다는 거죠. 그 때문에 캐릭터들의 심리묘사는 종종 당혹스럽습니다. 드라마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심리묘사의 기반이 약하기 때문에 캐릭터들의 행동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하는 겁니다. 관객들은 그냥 그러려니...하고 영화를 봐야합니다.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 신부 이야기가 끝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졸라의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그 이음새가 어디에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이나 뻔합니다. 영화가 던지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질문들 역시 충분한 지적 깊이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영화는 시작부터 수상쩍었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거기에 도달하려 무리하게 애쓰는 동안 부서져서 파편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이 영화를 엄청나게 재미있게 봤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저에겐 이 영화가 [복수 3부작]이나 [JSA]보다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시계 한 번 안 보고 영화를 끝낸 건 올해 들어 처음입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몇 분 더 길면 안 되나,하고 생각했던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고요. 물론 이건 취향 때문일 것입니다. 전 뱀파이어 이야기도 좋아하고 타락한 가톨릭 신자들의 이야기도 좋아하며 범죄심리물도 좋아합니다. 심지어 이렇게 파편화된 이야기도 제 취향입니다. 이런 취향을 다른 관객들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박쥐]의 매력과 재미는 사실 이 불완전한 구조에서 나옵니다. 전 분명히 뱀파이어 신부 이야기와 [테레즈 라캥]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파괴된 구조 속에서 이 둘은 예상 외로 재미있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괴상한 모양으로 함께 쌓여 있는 것이죠. 이 안에서 전 이 실패한 아이디어에 관대해집니다. 네, [테레즈 라캥] 각색물로도, 뱀파이어 이야기로도 엄청나게 새로운 이야기를 하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래도 [박쥐]는 여전히 [테레즈 라캥]을 각색한 뱀파이어 영화입니다. 전에 이런 걸 보신 적 있으신지요.

영화는 이 구조 안에서 거칠고 괴상한 재미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게 얼마나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도 잔뜩 나오는 박찬욱 코미디는 의도적입니다. 그리고 특히 중반 이후에 나오는 장르물적 쾌감은 철저하게 계산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괴상하고 히스테리컬한 재미 역시 치밀한 계획의 결과라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냥 두 주인공들처럼 영화 역시 완벽한 균형을 찾는데 실패했다고 보는 게 맞죠. 단지 그 상태가 영화와 묘하게 어울리는 겁니다. 김기영의 7,80년대 영화들을 상상해보시죠. 분위기가 꽤 유사합니다.

배우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이익을 본 사람은 김옥빈입니다. 엄청나게 고도의 테크닉을 과시하는 연기를 했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과 육체와 목소리와 분위기가 태주라는 캐릭터에 거의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며 배우가 그 틀 안에서 연기를 즐기고 있는 게 보입니다. 특히 후반부를 보고 있으면 저렇게 재미있어하는 걸 왜 지금까지 막고 있었나,하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습니다. 송강호는 그에 비하면 조금 덜 재미있습니다. 여전히 잘하지만 이런 식의 드라이한 블랙 코미디는 그가 아주 잘하는 영역은 아니죠. 그리고 상현처럼 억눌린 캐릭터는 시작부터 태주같은 캐릭터에게 어느 정도 가려질 수밖에 없어요.

또 무슨 정보를 드려야 할까요? 아, 노출. 대한민국 찌라시 기자들이 하이에나처럼 물고늘어지는 소재지만 거기 집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의 노출이나 섹스신은 그냥 평범한 R등급 영화 수준이에요. 스포일러니 제발 노출하지 말라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냥 폭로된 특정 장면도 야하거나 충격적이지는 않습니다. 다들 클릭수 높이려고 허풍을 떠는 거죠. (09/04/24)

DJUNA

기타등등

황우슬혜 나옵니다. 단역이에요. 호루라기를 걸고 다니는 캐릭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