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레옹 포치 Po-Chih Leong

주연
주드 로....스티븐 그로츠
Jude Law....Steven Grlscz
엘리나 뢰벤존....앤 레블스
Elina Löwensohn....Anne Levels
티모시 스팔....힐리 경위
Timothy Spall....Inspector Healey
케리 폭스....마리아 본
Kerry Fox....Maria Vaughan
잭 데븐포트....로치 경사
Jack Davenport....Sergeant Roche
애슐리 아터스....갱 리더
Ashley Artus....Gang Leader

1.

앤과 스티븐

스티븐 그로츠는 기본적으로 선량한 남자입니다. 지나치게 잘 생긴 그의 외모가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게 그 사람 잘못은 아니죠. 그는 동정심이 많고 상당히 이타적이며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불편한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흡혈귀입니다. 스티븐 그로츠와 사귄 여자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스포일러를 무릅쓰고 조금 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면, 그 역시 그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는 진정으로 그 여자들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피를 빨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더욱 더 고약한 것은 그가 다른 흡혈귀들처럼 아무나 공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희생자의 피 속에 녹아 있는 그에 대한 감정이 필요합니다. 시체를 처리하고 돌아오면 그는 공책에 그들의 마지막 감정을 기록합니다. 절망, 실망...

그에게도 희망은 있습니다. 만약 그가 완벽한 상대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한다면 그는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갤러리에서 우연히 만난 엔지니어 앤 레블스가 바로 그 상대가 될 수 있을까요?

2.

20세기 이후에 나온 수많은 흡혈귀물들처럼, [악어의 지혜]도 사랑과 죽음 사이에 놓인 고약한 패러독스를 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분위기를 몽땅 제거하고 뼈다귀만 늘어놓는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스티븐은 살아남기 위해 앤의 피를 빨아먹어야 합니다. (2) 그러기 위해서는 앤과 스티븐이 진짜 사랑을 나누어야겠지요? (3) 하지만 바로 그런 순간부터 스티븐은 앤을 죽일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런 것이니까요. 이 망할 놈의 패러독스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물론 이런 패러독스가 완벽하게 해결된다면 드라마로서의 재미가 없죠. 영화가 흘러가는 동안 스티븐은 위태롭게 경계선을 넘나들며 고민합니다. 뉴욕 타임즈의 엘비스 미첼은 이 친구가 너무 쿨하게 굴어서 그 고민의 절실함이 느껴지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저로서는 대충 용서해주고 싶군요. 이런 식의 쿨함은 흡혈귀들의 특권이 아닙니까? 이 장르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스티븐의 쿨한 생활 방식은 투명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의 감정을 읽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죠.

스티븐과 앤의 이야기는 보다 넓은 의미로 확장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연애하는 상대방에 대해 알아봤자 얼마나 압니까? 우리가 진실한 감정이라고 느끼는 것 중 몇 퍼센트나 진짜일까요? 우리의 감정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다면 상대방의 감정은 더더욱 말할 필요 없지 않겠어요? 사랑과 본능이 뒤섞이며 우리 몸 속에서 충돌할 때 어떤 재난이 닥칠 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요? 스티븐과 앤의 이야기는 우리보다 살짝 초현실적일 뿐 그렇게까지 예외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3.

비평가들은 종종 [악어의 지혜]을 홍콩 반환 이후 서구 영화계에 불어닥친 중국 열풍의 작은 예로 써먹곤 하는데, 그리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레옹 포치는 홍콩에서 그렇게까지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고, 그의 히트작인 [상해 1920]도 전형적인 홍콩 영화라고 보기엔 꽤 국제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영어권 영화계로 수출된 사람이라기보다는 영어권 영화계에 자연스럽게 통합된 사람이라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중국 영화의 분위기는 그렇게까지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앤이 우리에게 익숙한 지옥과 천국의 젓가락 이야기를 늘어놓고, 중국제 은비녀가 후반부에 상당히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그뿐이군요. 그보다 더 강한 것은 최근 들어 이런 종류의 장르 영화계를 장악한 쿨한 서스펜스 영화의 느낌입니다. 늘씬하게 잘 빠졌지만 그만큼 무개성적이라고 할 수도 있죠. 종종 이 영화는 지나치게 예술 영화 티를 낸다는 비판을 받는데, 90년대 이후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는 그렇게까지 튀는 영화로 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주드 로와 엘리나 뢰벤존은 모두 관객들이 그들에게 기대할 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저에겐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드 로와 엘리나 뢰벤존이 흡혈귀 영화에서 공연하는 걸 보고도 투덜거린다면 제가 배은망덕한 거죠. (01/04/04)

DJUNA

기타등등

98년에 만들어진 영국 작품이지만 미국에서는 2000년에나 개봉되었고 그나마 제대로 배급되지도 않았습니다. 영화 제목도 비디오로 출시될 때 [Immortality]로 바뀌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