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다리오 아르젠토 Dario Argento

주연
아지아 아르젠토....안나 마니
Asia Argento....Anna Manni
토마스 크레츠만....알프레도 그로시
Thomas Kretschmann....Alfredo Grossi
마르코 레오나르디....마르코 롱기
Marco Leonardi....Marco Longhi
루이지 디베르티....마네티 경위
Luigi Diberti....Insp. Manetti
파올로 모나첼리....카바나 박사
Paolo Bonacelli....Dr. Cavanna
줄리앙 람브로치니....마리
Julien Lambroschini....Marie
존 쿠엔틴....안나의 아버지
John Quentin....Anna's father

안나

[스탕달 신드롬]은 여러가지 면에서 예외적인 아르젠토 영화입니다. 우선 이 영화에는 가죽장갑을 낀 살인자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르젠토 풍의 화려한 살인장면도 거의 나오지 않고요. 영화는 강간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는데, 아르젠토의 영화에 나오는 많은 살인장면들이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이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룬 건 이번이 처음이지요.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각색물입니다. 그라지엘라 마게리니라는 작가가 쓴 소설이 원작이죠.

마지막의 예외가 다른 예외 상황들을 설명합니다. 이 영화에 아르젠토의 느낌이 덜한 건 마게리니의 원작이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이전의 아르젠토라면 여성 주인공의 심리 묘사를 깊이 파는 영화를 만들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스탕달 신드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강간 사건 이후 흔들리는 여성 주인공의 심리묘사예요.

왜 아르젠토는 이 소설을 선택했을까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아이디어는 아주 흥미로운 이미지를 품고 있습니다. 위대한 예술작품의 힘에 압도당해 정신을 잃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말이에요. 둘째, 아르젠토는 슬슬 자신이 아르젠토식 살인말고 다른 것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단점인 내러티브의 빈약함을 보완해 줄 소설이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내용. [스탕달 신드롬]의 주인공 안나 마니는 강간사건전문 형사입니다. 어느 날 안나는 피렌체의 우피치 박물관에 들어갔다가 스탕달 신드롬으로 정신을 잃습니다. 안나가 쫓던 연쇄 강간범은 무력해진 안나를 강간하고 안나의 정신은 스탕달 신드롬과 강간 후유증으로 점점 황폐해집니다.

이 영화는 아르젠토가 그의 딸 아지아를 주인공으로 강간장면을 찍었다고 해서 악명이 높습니다. 저 역시 그게 그렇게 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기에 약간의 변호는 필요한 것 같군요. [스탕달 신드롬]은 이런 종류의 강간복수극들과는 달리 강간을 그렇게 관음증적인 음란함으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소재상 당연히 그런 가능성을 품고 있고 또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영화는 될 수 있는 한 이 황량한 범죄에서 쾌락을 제거하려 하고 있지요. 아마 딸이 희생자로 나왔기 때문에 아르젠토가 더 절제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간 이후를 다루는 방식에도 상당한 성의가 보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아르젠토보다는 마게리니의 몫이겠죠. 설정은 어색하고 대사도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안나 마니의 고통스러운 이야기에는 드라마의 실체가 느껴집니다. 안나는 아르젠토의 다른 여자 주인공들과는 달리 심리 묘사가 가능한 내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르젠토는 폐쇄적인 자기 세계를 성공적으로 벗어난 것일까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하기엔 아르젠토가 너무 나이를 먹었던 게 아닐까요? 아르젠토는 새로운 이야기에 맞는 스타일을 구축하는 대신 그냥 맥없이 마게리니의 이야기를 따라갈 뿐입니다. 이야기는 충분히 공포스럽고 혐오스럽지만 그 이야기를 정당화할 영화적 실체는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해요. 가죽 장갑의 살인자 대신 사용되는 초현실적인 악몽은 충분치 못하고 새로 도입된 컴퓨터 그래픽도 재래식 특수 효과의 끔찍한 느낌은 살리지 못합니다. 스탕달 신드롬을 다루고 있으면서 예술 작품의 비중이 예상보다 크지 못한 건 아마 아르젠토가 내러티브에 끌려다니느라 충분한 자유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군요.

연기 역시 문제가 많습니다. 이건 꼭 배우의 능력 문제는 아니에요. 아지아 아르젠토는 재능있는 좋은 배우이니까요. 하지만 고도의 심리묘사가 필요한 이 영화의 주연을 맡기엔 경험도 부족했고 나이도 어렸습니다(원래 아르젠토는 브리짓 폰다나 제니퍼 제이슨 리가 주연을 맡길 바랐던 모양이에요.) 결정적으로 대사의 힘을 빼앗아버리는 아르젠토식 다국적 영화 만들기로는 연기의 힘을 살리기 어려웠지요. 게다가 그는 원래 연기에 신경쓰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한 사람이 아닌가요? 이런 사람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심리물을 만든다고 대단한 게 나오겠습니까?

지금와서 보면 아르젠토가 딸 아지아를 주연으로 내세워 찍은 [스탕달 신드롬]과 [오페라의 유령]은 중년을 넘긴 나이 든 감독의 예술적 방황에 가까운 것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찍고나서 그가 다시 전형적인 아르젠토 지알로인 [슬립리스]로 돌아왔다는 건, 그 성과가 변변치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04/09/28)

DJUNA

기타등등

많이들 [스탕달 신드롬]이 아지아 아르젠토를 주연으로 내세운 첫번째 아르젠토 영화라고 착각하지만 아지아는 그 이전에 아르젠토의 미국 영화 [트라우마]에도 출연했었습니다. 이 영화는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