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만희

주연
신성일
문희
최봉
이향
이용
이해용
조덕성
지귀남
나애심
박민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선과 석구

영화는 신성일이 연기한 석구라는 남자가 밤에 빈 건물로 잠입해 금고를 터는 장면으로 시작해요. 금고에서 서류를 꺼내 떠나려는데 인기척을 듣고 내려온 엽총을 든 남자가 그의 길을 가로막죠. 석구와 남자는 싸웁니다. 그냥 싸우는 게 아니라 3층 쯤 되는 계단을 굴러 내려가면서 피터지게 싸워요. 서로를 물어 뜯는 짐승처럼 처절한 결투이면서도 형식면에서는 세련되기 그지 없는 장면이죠.

딱하게도 엽총 든 남자에겐 결말이 안 좋았어요. 석구를 쫓다가 그만 내려가는 철문에 눌려 죽거든요. 죄책감에 빠진 석구는 남자가 안고 있는 가방을 그냥 방치해 둔 채 달아나고 잠시 카메라는 음악과 함께 내려간 철문을 잡아요. 아마 여기서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간 것 같아요. 제가 본 필름엔 왜 크레딧이 없는지 모르겠지만요.

석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연히 고용주들에게 혼났죠. 지 딴에는 양심에 찔려서 차마 물건을 가져올 수 없었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나요? 그 사람이 죽은 건 순전히 자기가 서툴러서예요. 그걸 고용주에게 뒤집어 씌우면 안 되지요. 물론 처음부터 산업스파이질을 해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기가 선택한 일이라면 일은 해내는 게 도리죠. 생각해보니 완전 민폐 캐릭터예요.

고용주들은 석구(영화 속에서 이 이름은 한 번도 불려지지 않는 것 같아요)를 제거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연한 결정이죠. 살인사건 때문에 석구가 체포되어 자기네들이 7년 동안 꾸민 일이 다 발각되면 어쩌라고요. 하지만 이 사람들의 계획은 좀 이상해요. 이들은 일단 석구에게 설악산 관광을 보내요. 그것도 패키지 투어팀에 섞어서요. 그것으로 끝이냐. 아뇨. 문희가 연기한 선(이 이름도 안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이라는 길거리 매춘부를 한 명 붙여 신혼부부처럼 행세하게 해요. 그러면서 뒤에 석구가 이름을 모르는 회사 사람을 한 명 붙이고요.

이해가 되는 살인계획인가요? 가장 괴상한 건 선의 역할이죠. 암만 생각해도 전 모르겠어요. 선이 회사의 살인공범자냐, 그건 아니에요. 선은 석구가 죽을 운명인지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감시를 위해 붙인 거냐. 그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그럴 필요가 뭐가 있나요? 이미 패키지 투어 팀에 킬러가 있는데. 그렇다면 살인 이후 증거를 조작하는 거짓증인이냐... 그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조금 수사하면 신혼부부가 아닌 게 들통날 거고 그렇다면 경찰이 뭔가 이상하다며 뒤를 캘 텐데? 그렇다면 석구를 안심시키기 위한 속임수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게 일을 망쳐놨는데, 그런 선물을 주는 게 오히려 이상하잖아요. 당연히 의심하죠. 사실 설악산 관광 선물도 의심하기 딱 좋아요. 의심을 떠나서 생각해도 이상한 계획인 건 마찬가지에요. 패키지 투어 팀 안에 섞여 있는 동안 살인을 한다는 건 정말 괴상한 계획이 아닌가요? 증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변수도 지나치게 많아요.

생각해보면, 6,70년대 한국 장르 영화에서 이치에 맞는 영화를 본 적이 없어요. 어딘지 모르게 모두들 심리묘사나 상황 논리가 어긋나 있지요. 이만희도 예외는 아니죠. 전 [마의 계단]을 정말 좋아하지만 그 영화도 그렇게 앞뒤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작품은 아니었어요. 리메이크작인 [여섯개의 그림자]로 대충 모양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인 [다이알 112를 돌려라]도 그렇게 치밀한 영화는 아닐 거예요. 이 영화들을 다시 보면 거의 이탈리아 지알로 영화들만큼이나 비논리적이죠. 그걸 매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알로 영화들의 시시한 각본이 장점이 아니듯, 이 역시 장점으로 보긴 어려워요.

하여간 이들은 설악산 여행을 갑니다. 이 부분에서 영화는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져요. 석구의 컴컴한 삶을 다룬 장르물이던 것이,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인 여행팀을 다룬 인간군상의 묘사로 바뀌는 것이죠. 은근히 존 포드의 [역마차]를 연상시켜요. 존 포드가 이 영화를 만들 때 참고했다던 기 드 모파상의 단편 [비계덩어리]가 생각나기도 하고요. 여기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해요. 나이 지긋한 호색한 산부인과 의사와 그의 아내, 막 결혼한 신혼부부, 아버지 돈으로 먹고 사는 게 분명한 의사 아들, 주변 사람들을 작품 소재로 써먹으려는 추리소설 작가, 아직도 직업 정신이 완전히 날아가지 않은 전직 형사... 물론 회사에서 보낸 킬러도 있고요.

이들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석구가 아니라 선이에요. 직업상 선의 정체를 알고 있던 산부인과 의사가 그 사람을 농락하려다 실패하자 그만 선의 직업이 무엇인지 불어버린 거죠. "그래서 뭐?"라며 그냥 쿨하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몇몇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선을 왕따시키고 모욕을 주죠. 제가 왜 [비곗덩어리]를 언급했는지 알겠죠? 물론 이 영화는 모파상의 소설보다 훨씬 거칠어요. 군중묘사나 중간중간의 농담도 거친 건 마찬가지고. 전 당시 영화 속의 농담들이 왜 그렇게 나빴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냥 옛 시대의 농담이라고 생각하기엔 질과 감각이 너무 떨어져요. 아마 당시엔 그런 감각을 갖출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죠.

어쨌건, 선은 석구와 사랑에 빠져요. 선에게 석구는 유일하게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도 제대로 사람대접을 해주는 사람이죠. 하긴 자기 처지를 아니 매춘부라고 구박할 이유도 없지만 역시 이유보다는 결과가 중요한 거죠. 심지어 이들 사이엔 섹스도 없어요. 나중에야 기회가 안 되었다고 쳐요. 하지만 호텔에서 보낸 첫 날도 손만 잡고 잤다는 설정은 좀 심하게 귀엽지 않나요? 이들은 결코 그렇게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하여간 회사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걸 알게 된 석구는 선을 떠나기로 합니다. 선은 석구를 붙잡아요. 여기서 이 영화의 명대사가 나옵니다. 석구가 선에게 돈다발을 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난 너를 산다". 당시 신성일 팬들은 이 쿨한 대사를 듣고 엑스타시에 빠졌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저에겐 신성일과 쿨함을 한 문장 안에 담는 것도 무척 힘겨운 일입니다. 그냥 슬프군요.

선과 석구는 달아납니다. 여기서 석구가 불치의 민폐 캐릭터라는 사실이 드러나죠. 다음 날, 같이 여행 왔던 팀원들은 실종된 이들을 찾아 나서거든요. 전엔 창녀라서 같이 못 자겠다며 따돌렸지만 그래도 이들을 산에 버리고 올 사람들은 아니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선과 석구가 이 사실을 몰랐느냐? 아뇨. 알고 있었어요. 사방에서 야호 소리가 들리는 걸요. 선은 팀원들에게 섞여 다니는 게 안전하지 않겠냐고 제안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옳은 소리에요. 하지만 석구는 살인자를 받아줄 사람은 없다나, 뭐 그런 폼나는 소릴 하며 자기뿐만 아니라 선까지 위험에 빠트립니다.

킬러들이 따라옵니다. 아니 왜 갑자기 킬러가 킬러들이 되었냐고요? 성미 급한 회사 간부 둘이 설악산으로 따라왔거든요. 설악산에서 석구를 죽이는 이유가 자기네들이 연관되기 싫어서가 아니었나요? 물론 그 사람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씁니다.

이제 영화는 두 번째 계단 장면으로 우릴 인도합니다. 석구와 선이 산의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세 사람의 킬러들이 그들을 포위해요. 한 명은 위에서 내려오고 두 명은 밑에서 올라오죠. 석구는 허리띠를 풀러 난간에 걸고 한 명씩 이들과 싸웁니다. 물론 한꺼번에 덤벼들지는 않아요.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막판까지 쏘지도 않고요. 무척 편리하게 짜여진 설정이죠. 하지만 최종 효과는 근사해요. 적당한 고소공포증과 허리띠의 효율적인 활용, 직접 살인을 묘사하는 대신 사운드만으로 추락한 남자의 운명을 암시하는 적절한 설정 같은 것 덕택에 이 격투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첫 번째 계단 장면보다는 덜하지만요.

석구는 살아남았을까요? 아뇨. 두 사람은 죽었지만 밑에 남아 있던 총든 간부 아저씨가 빵!하고 석구를 쐈어요. 관습적인 권선징악을 이루기 위해 밑에서는 드디어 일행을 발견한 여행팀 사람들이 살인자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은 흐릿한 배경 뒤에서 일어날 뿐이에요. 계단 아래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무시하고 석구는 선이 있는 위쪽 계단을 향해 비척비척 올라가다가 결국 선의 품 안에서 죽습니다. 아무래도 수상해서 계속 그들의 뒤를 밟았던 전직 형사는 선에게 그들의 관계를 묻습니다. 하지만 선은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의 이름로 모르고 성도 모르죠. 그거야 관객들도 마찬가지고.

선은 다시 소공동 조선 호텔 앞의 자기 본거지로 돌아갑니다. [원점]이라는 제목을 정당화하듯, 선이 소개되는 첫 장면의 설정이 거의 그대로 반복돼요. 선은 거지 소년에게 적선을 하고 잠시 뒤 선이 맘에 든 중절모를 쓴 남자가 그 사람의 뒤를 따르죠. 첫 번째 장면에서 선의 사업은 회사에서 고용하러 온 킬러 때문에 중단되었죠. 저로서는 이번엔 저번처럼 중단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그 사람도 먹고 살아야죠. (06/10/23)

DJUNA

기타등등

배경 위에 크레딧이 뜨지 않는 필름보다 더 이상한 건 왜 한국영상자료원에 있는 한국영화들 중 크레딧이 날라간 영화들이 그렇게 많냐는 거죠. 답변해주실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