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요제프 폰 스테른베르크 Josef von Sternberg

주연
마를레네 디트리히....에카체리나 2세/소피아 프레데리카
Marlene Dietrich....Catherine II/Sophia Frederica
존 로지....알렉세이 백작
John Lodge....Count Alexei
샘 재프....표트르 대공
Sam Jaffe....Grand Duke Peter
루이즈 드레서....엘리자베타 여제
Louise Dresser....Empress Elizabeth
C. 오브리 스미스....아우구스트 왕자
C. Aubrey Smith....Prince August
개빈 고든....그레고리 올로프
Gavin Gordon....Gregory Orloff
올리브 텔....요한나 왕자비
Olive Tell....Princess Johanna
루셀마 스티븐스....엘리자베타 백작부인
Ruthelma Stevens....Countess Elizabeth

에카테리나의 반격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진홍의 여제]는 그레타 가르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나온 바로 다음 해에 나온 작품입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그럴 리가요. 디트리히 영화가 가르보 영화를 따라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가르보의 [마타 하리]가 나온 직후 디트리히의 스파이물 [Dishonored]가 나오기도 했잖아요. 염치없어 보이긴 하지만, 후발 주자였던 디트리히가 가르보의 경로를 부지런히 따라했던 것도 그렇게까지 이상하지는 않아요. 관객들로서도 잃는 게 없죠. [크리스티나 여왕]과 [진홍의 여제]는 전혀 다른 작품인 걸요.

[진홍의 여제]의 주인공은 에카체리나 2세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대충 아시죠? 프러시아의 공주였다가 나중에 표트르 3세가 된 표트르 대공의 신부가 되어 러시아에 보내졌다가 그를 살해하고 황제가 된 사람입니다. 표트르 1세에 맞먹는 흥미로운 전제군주이고 이야기거리도 많죠. [진홍의 여제]는 에카체리나 2세의 일기를 바탕으로 해서 이 사람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남편을 죽이고 황제가 된 날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일기를 원작으로 했다고 해서 역사에 충실한 그 어떤 무언가를 기대하신다면 큰코 다칩니다. [진홍의 여제]는 역사의 재현 따위엔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요. [진홍의 여제]는 요란하고 통속적이고 꽤 저속한 멜로 드라마로, 에카체리나 2세라는 인물도 마를레네 디트리히라는 일류 스타에게 화끈한 스토리와 카리스마를 제공해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물론 여러분은 여기에서 여러 흥미진진한 주제를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진홍의 여제]는 여러모로 [엘리자베스]와 닮은 점이 많은 작품이지요. 둘 다 남성위주의 무시무시한 정치세계에서 어떻게 한 여성이 군주로 성장해가는가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그러나 [진홍의 여제]의 각본에는 그렇게 심각한 고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섹스와 스캔들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지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진홍의 여제]는 상당히 저속한 영화입니다. 각본도 꽤 덜컹거리는 편이라 관객들이 드라마에 쉽게 몰입할 수 있는 편도 아니죠. [크리스티나 여왕]처럼 거창한 로맨티시즘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편도 아니고요.

그렇다면 [진홍의 여제]가 지금까지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요제프 폰 스테른베르크가 우리 눈 앞에 펼쳐놓는 화면이 너무나도 강렬합니다. 스테른베르크가 보여주는 러시아는 실제 러시아가 아닙니다. 그가 아무리 고증을 따를만큼 따랐다고 주장해도 말이에요. 이 영화 속에 나오는 러시아는 스테른베르크의 바로크적 상상력에 감염된 돌연변이 괴물입니다. 궁정 곳곳에 깔린 그림자 밑에 숨어 있는 외계 괴물 같은 조각상들과 멀쩡한 식탁 위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 해골 사이에서 멋대로 디자인된 사치스러운 옷을 입은 남녀들이 벌이는 온갖 멜로드라틱한 애정 행각을 보고 있으면 혀가 쑥 빠진답니다.

이 정신없는 시각적 향연은 그냥 캠피하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압도적이고, 진지하게 바라보자니 도가 지나칩니다. 하여간 정신없어요. 스토리의 천박함을 대충 잊는다면 [진홍의 여제]를 보는 건 단순한 영화 감상이 아닌 총체적인 시청각적 경험입니다. 이런 스타일은 다소 얄팍한 각본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엄청나게 자극적인 코미디와 비장한 역사극 사이를 오가는 정신없는 느낌은 순전히 스테른베르크의 이미지와 사운드가 만들어낸 창조물입니다. 당시 관객들은 쉽게 적응하지 못했을 거예요. 스테른베르크의 미학은 시각적/문화적 공습에 익숙한 현대 관객들에게 더 적합한 것이니까요.

두 번째 이유는 당연히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존재입니다. 스테른베르크가 창조해낸 음험한 그림자극 안에서 디트리히는 정말 진주처럼 빛이 납니다. 특별히 엄청나게 기교가 섞인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거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화면 속에서 확 살아나요. 그 때문에 디트리히는 스테른베르크가 그의 컴컴한 화면 속에 집어넣은 또 하나의 조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디트리히 팬들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직 철없는 척하는 어린 공주를 연기하는 디트리히의 드문 모습에서부터 남장을 하고 말에 탄 채 남편의 궁전 안을 질주하는 기가 막힌 결말에 이르기까지 모두요. 물론 수도 없이 튀어나오는 디트리히의 기가 막힌 정면 클로즈업은 당연하고요. 어떻게 이런 영화를 쉽게 거부할 수 있겠어요? (01/06/12)

DJUNA

기타등등

같은 인물을 다룬 캐서린 지타 존스 주연의 A&E 텔레비전 영화가 얼마 전에 국내에서 출시되었습니다. 그 영화도 한 번 보고 비교해보기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