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윤교

주연
방수일
최인숙
도금봉
오경아
나정옥
박순봉
주상호

백골령의 흡혈귀

[백골령의 마검]의 시대 배경은 고려 시대. 도금봉 캐릭터가 송나라에서 왔다는 언급이 나오고 사람들이 고려 시대 복장으로 추정되는 옷을 입고 나오니 그럴 거라고 찍어 보는 거죠.

영화가 시작되면 막 과거에서 떨어진 남자 주인공은 외딴 절이나 찾아 다음 시험까지 공부나 해볼까... 생각하는 중입니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래봤자 별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 이 친구, 암만 봐도 과거에 붙을만한 머리도, 끈기도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주인공은 백골령에 있는 여자들만 사는 집에 잠시 머물게 되는데, 그 집 여자 주인에게서 남편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습니다. 멀쩡하게 조강지처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이 한심한 남자는 덜컥 그 제안을 받아들이죠. 송나라에서 왔다는 그 여자 주인과 하녀가 귀신 겸 흡혈귀라는 걸 까맣게 모른 채로요.

여기서 이야기는 둘로 갈라집니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남편이 새 귀신 아내와 줄기차게 섹스를 하는 동안, 집에서 기다리던 조강지처는 남편에게 뭔가 이상한 일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지요. 타이밍이 딱 맞게 나타난 도사의 도움으로 귀신들을 처리할 마검을 챙긴 아내는 남자로 변장하고 남편을 찾아 나섭니다.

솔직히 [백골령의 마검]의 처음 절반은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감정이입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바보스러운 남자 주인공은 너무나도 수동적이어서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제외하면 자신의 어리석음을 충분히 표출하지도 못합니다. 정체가 드러나기 전엔 도금봉 흡혈귀와 하녀도 남자를 유혹하거나 섹스하는 것 이외엔 하는 일이 별로 없고요.

두 흡혈귀의 정체가 밝혀지면 영화의 바보스러움이 터져나옵니다. 일단 유령들이 흡혈귀라는 설정부터 그렇죠. 이들은 소박맞고 죽은 원귀이므로 흡혈귀가 되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해머 영화들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건 흡혈귀'라는 선입견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그냥 흡혈귀로 하자고 우긴 거죠. 당시 한국 호러 장르에서 이건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지금 관객들에겐 우스꽝스럽고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구체적인 설정도 배꼽잡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세요. 흡혈귀의 진짜 정체입니다. 해골에 가발을 씌우고 줄에 매달아 흔들면서 그걸 무시무시한 흡혈귀라고 믿으라는 거예요. 완전히 [뽀뽀뽀]죠. 뒤에 흡혈귀가 아닌 귀신도 하나 나오는데, 그 특수 효과도 대단합니다. 몇몇 장면에서는 고정된 스틸로 등장하고 그나마 조금 움직이는 장면에선 등에 매단 줄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보일 정도거든요. 이 정도이니, 낮에 흑백으로 찍은 장면을 밤이라고 우기는 소박한 데이 포 나잇 테크닉은 거의 클래시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전혀 내용의 분위기와 맞지 않고 고증도 굉장히 수상쩍은 귀신들린 집이야 '제작비 때문이려니' 하고 용서해줄 수 있고요.

처음엔 지루하던 스토리도 이런 특수효과들이 터져 나오는 동안 원래의 찬란한 바보스러움을 되찾습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토종 귀신과 흡혈귀, 엉터리 무협과 [전설의 고향]식 열녀전이 얽히면서 정말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만들어내죠.

하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여전히 짜증이 남습니다. 바보스러운 남자 주인공보다는 여자 캐릭터들에게 더 화가 나죠. 남자주인공의 아내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남자에게 자신의 재능과 에너지를 굴종적으로 낭비하고 있고, 소박 맞고 죽은 여자 귀신들은 정말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고 있지요. 후반에 나오는 하녀 귀신은 참으로 딱하더군요. 주인에게 강간당한 것만해도 화가 나 죽겠는데, 질투로 달아오른 중국인 첩에게 살해당하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억울해요? 게다가 저승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온 몸에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느끼한 바보와 섹스를 하는 방법밖엔 없다니... 으...

이 영화의 헤로인인 도금봉은? 흠...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도금봉은 이 영화에서 가장 배우처럼 보이는 사람입니다. 당당한 스타고요. 하지만 전 당시 관객들이 이 배우한테서 무엇을 보았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도금봉은 현대 관객들이 '유혹적이고 섹시한 흡혈귀'를 떠올릴 때 머리 속에 그릴만한 외모를 하고 있지는 않죠. 그 사람의 과장된 연기 스타일은 더욱 더 농담처럼 보이고요. 이 배우가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장면들은 보면 볼수록 캠피한 코미디처럼 느껴집니다. 다른 식으로 감상할 수가 없어요.

[백골령의 마검]은 1969년 개봉 당시 상당한 흥행작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당시 관객들이 즐겼던 방식으로 즐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Mystery Science Theater 3000]식 수다가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게 깔린다면 적어도 도입부의 지루한 40여분도 어느 정도 커버가 되겠지요. (05/07/07)

DJUNA

기타등등

그렇게 정확하다고 할 수 없는 영어 제목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가져온 것이니 제 탓 마시길. 아마 번역한 사람이 '白骨嶺'을 '白骨靈'이라고 착각한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