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멸망 The Fall of the Roman Empire (1964) * * *

감독
안소니 만 Anthony Mann

주연
소피아 로렌....루실라
Sophia Loren....Lucilla
스티븐 보이드....리비우스
Stephen Boyd....Livius
알렉 기네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Alec Guinness....Marcus Aurelius
제임스 메이슨....티모니데스
James Mason....Timonides
크리스토퍼 플러머....코모두스
Christopher Plummer....Commodus
안소니 퀘일....베룰루스
Anthony Quayle....Verulus
존 아일랜드....발로마르
John Ireland....Ballomar
오마 샤리프....소하무스
Omar Sharif....Sohamus
멜 페러....클레안더
Mel Ferrer....Cleander
에릭 포터....율리아누스
Eric Porter....Julianus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
리들리 스코트의 새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대해 읽다 보면 머리 속에서 데자뷰 현상이 빙빙 도는 걸 막을 수 없습니다. 분명 전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영화를 보았는데... 어디서였더라?

그 영화는 5,60대에 나왔던 수많은 로마 제국 영화들 중 어느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샌달을 신은 근육질 아저씨들이 잔뜩 나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치고 받는 영화들 말이에요 (게이 팬들이 이런 영화에 열광하는 건 너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러나 이 경우, 그 유사성은 더 분명합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안소니 만의 [로마 제국의 멸망]이라는 영화가 떠오를테니까요. [로마 제국의 멸망]과 [글래디에이터]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현제의 죽음 이후 몰락해 가는 주인공, 사악한 새 황제, 심지어 주인공이 황제의 누이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같죠. 어떻게 보면 [글래디에이터]는 [로마 제국의 멸망]의 리메이크처럼 보입니다.

이런 유사성은 사실 그렇게 놀랍지 않습니다. 수많은 장희빈 텔레비전 시리즈가 다 비슷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까요. 두 영화의 시대 배경은 같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집권 말기과 코모두스 황제의 짧은 집권 시기 말이에요.

[글래디에이터]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기로 하죠. 아직 보지도 못한 영화니까요. 하지만 [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해서는 몇 마디 더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은 새무얼 브론스톤이 제작한 일련의 스펙타클 사극 영화들의 종지부를 찍는 작품입니다. 브론스톤은 이전에 [엘 시드], [왕중왕]과 같은 호사스럽고 거창한 사극 영화들을 만들어 히트시킨 적 있습니다. 아마 그는 이번에도 비슷한 성공을 노렸을 겁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번에는 운이 따라주지는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은 상업적 재앙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무도 영화를 보러 와주지 않았던 거예요! 영화에 2천만 달러나 퍼 부었던 브론스톤은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20세기 폭스가 [클레오파트라]로 끔찍한 재정적 지옥에 빠진지 꼭 1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로마 사극 영화라는 장르가 죽어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로마 제국의 멸망]이라는 제목은 무척 상징적입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로마라는 제국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참 잘 나갔던 로마 사극이라는 장르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때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지금 관객들에게는 그렇게 읽힙니다.

그런데 제목이 왜 [로마 제국의 멸망]일까요? 코모두스 이후에도 로마는 수백년을 더 살아남았습니다. 영화는 코모두스가 '제국 멸망의 시작'이라는 과장된 설명으로 제목을 변호합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은 내리막길의 첫번째 걸음에 대한 영화입니다. 영화가 인기 없었던 것은 당연해요. 한마디로 소재부터가 기분을 팍 상하게 하니까요. 로마 사극의 팬들은 제국의 거대함을 감상하는 사람들이었지, 제국의 붕괴를 감상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영화 자체는 어떨까요? 이 영화는 재평가될 구석이 있는 작품일까요?

거의 4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평은 그렇게 일치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쓸데 없는 장황함, 배우들의 낭비, 맥빠진 스토리, 역사적인 부정확성, 스노비즘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또 꽤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스펙타클, 종종 지적인 대사들, 할리우드에서도 오래 전에 사라진 수공업적인 장인 전통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뭐, 두 입장이 그렇게까지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각자 좋아하는 것들을 택해 비판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라면, 저는 이 구닥다리 사극에 애착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방지고 스노비시한 작품이기는 해도 남는 것은 많고 인상적인 장면들 역시 많습니다. 특히 갑옷 입은 로마 병사들이 북유럽의 눈덮인 숲 속을 질주하는 장면들의 인상은 아주 강합니다. 몰락이라는 분위기에 들어맞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일단 보기 힘든 장면이니까요. 영화 중간 중간에 살짝 살짝 끼여드는 [철학 이야기]의 저자 윌 듀런트의 역사관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으며 (그는 이 영화에서 역사 자문을 맡았습니다) 코모두스 역의 크리스토퍼 플러머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역의 알렉 기네스의 인상적인 연기를 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이 영화의 망가진 모습도 붕괴된 로마 시대의 건축물과 같은 매력을 풍깁니다. 이 영화는 작품 자체로보다는 아름답지만 반쯤 망가진 시대의 유물로서 기억될 가능이 높습니다. (00/05/18)

DJUNA


기타등등

[로마 제국의 멸망]을 영화가 나왔던 60년대 미국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뭐, 가능한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