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시드니 폴락 Sydney Pollack

주연
해리슨 포드....더치 반 덴 브록
Harrison Ford....Dutch Van Den Broeck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케이 챈들러
Kristin Scott Thomas....Kay Chandler
찰스 더튼....앨시
Charles Dutton....Alcee
보니 헌트....웬디 저드
Bonnie Hunt....Wendy Judd
데니스 헤이버트....조지 보포트
Dennis Haysbert....George Beaufort
시드니 폴락....칼 브로먼
Sydney Pollack....Carl Broman
리처드 젠킨스....트루먼 트레이너
Richard Jenkins....Truman Trainor
폴 길포일....딕 몬토야
Paul Guilfoyle....Dick Montoya
수잔나 톰슨....페이튼 반 덴 브록
Susanna Thompson....Peyton Van Den Broeck
피터 코요테....컬런 챈들러
Peter Coyote....Cullen Chandler
딜란 베이커....리처드 저드
Dylan Baker....Richard Judd
린 시그펜....필리스 보나파르트
Lynne Thigpen....Phyllis Bonaparte
수잔 플로이드....몰리 롤
Susan Floyd....Molly Roll
빌 콥스....마빈
Bill Cobbs....Marvin
케이트 마라....제시카 챈들러
Kate Mara....Jessica Chandler

듀나 [랜덤 하트]는 올해 헐리웃에 나온 영화들 중 비평적 성과가 기대치에 가장 못 미친 작품일 겁니다.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 영화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시드니 폴락은 '거장'도, '오퇴르'도 아니지만, 헐리웃 시스템 안에서 양질의 작품을 꾸준히 생산해온 능력있는 감독입니다. 해리슨 포드나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와 같은 믿음직스러운 배우들이 주연이고요. 원작자 워렌 애들러는 스티븐 킹과 같은 거물은 아니지만 그의 소설을 각색한 [장미의 전쟁]은 안전한 성공작이었습니다. 모인 사람들의 이름이 이렇게 믿음직스러우니, 굉장한 걸작은 아니더라도 괜찮은 영화가 나올 거라는 게 일반적인 기대였지요.

하지만 시사회 이후부터 불길한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문은 원작자인 애들러가 뉴욕 타임즈에 시드니 폴락과 영화를 비난하는 글을 올리면서 공식화되었습니다. 결과 역시 좋지 못했습니다. 영화의 흥행 성적은 그저 그랬고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싫어했습니다.

마땅히 여기서 질문을 해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렇게 안전한 프로젝트가 철저하게 망가진 것일까요?

파프리카 그건 위에 나열된 사람들이 생각만큼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웃 오브 아프리카] 이후 폴락의 성적은 그저 그랬습니다. [야망의 함정]은 나름대로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하바나]나 [사브리나]는 결코 성공작이 아니었지요. 게다가 이 두 영화들은 모두 로버트 레드포드나 해리슨 포드와 같은 늙은 배우들을 주연으로 내세운 작품이어서, 비슷한 캐스팅인 [랜덤 하트]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해리슨 포드 역시 액션물에서 벗어나서 성공한 예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는 원래부터 '흥행배우'가 아닙니다. 애들러의 전작인 [장미의 전쟁]는 흥미로운 영화였지만 그게 그가 헐리웃에서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성과가 아닙니까?

듀나 오늘 저녁에 이 영화를 보았는데, 걱정했던 것만큼 지루한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전 올해만 해도 이보다 훨씬 지루한 흥행성공작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런어웨이 브라이드]나 [형사 가제트]는 이보다 훨씬 따분한 작품들이었어요.

이 영화는 '못' 만든 영화도 아닙니다. 필립 루슬로의 화면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우며, 그럴싸하게 분위기를 잡아주는 데이브 그루신의 음악도 좋습니다. 각 장면들만 따로따로 떼어놓고 보면 모두 기술적으로 매끈하게 잘 구성되어 있어서, 시드니 폴락이라는 남자가 지금까지 헐리웃이라는 동네에서 쌓아올린 경륜이 눈에 보입니다.

파프리카 하지만 보이는 것은 경륜 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매너리즘 역시 보이는 걸요. 시드니 폴락은 지금까지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공식을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두 성숙한 남녀의 가을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연애담 말이에요. 문제는 그게 [추억]이나 [아웃 오브 아프리카], 심지어 [콘돌의 3일]과 같은 영화에도 맞았지만 [랜덤 하트]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죠.

[랜덤 하트]는 어떤 이야기인가요? 이 영화는 비행기 사고로 배우자를 잃은 두 남녀가 죽은 남편과 아내가 그들 모르게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주 훌륭한 도입부입니다. 굉장히 많은 것을 끌어낼 수 있는 보고죠. 많은 가능성 중에 하나만 제대로 끄집어 내도 영화는 근사해질 겁니다.

이 도입부로 근사한 추리 영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내나 남편의 알려지지 않았던 과거를 밟아가다가 보다 큰 사건에 연결되는 줄거리가 나올 수도 있겠지요. 이 영화는 망집에 대한 작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배우자의 과거에 집착하며 망가지는 사람들을 그린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죠. 영화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살아남은 두 피해자들의 러브 스토리가 나올 수도 있지요. 영화는 살아남은 두 사람들의 극복에 대한 영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죽은 배우자의 배신으로 새로운 인생을 쌓아가는 이야기로 쓸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시드니 폴락의 선택은 참 이상합니다. 거의 프로답지 못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는 영화를 망집에 대한 이야기로 끌어가려는 것 같습니다. 죽은 남녀한테는 특별히 밝혀야 할 별다른 비밀이 없거든요. 영화 초반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 알게 됩니다. 죽은 사람들이 보기만큼 충실한 배우자가 아니었다는 것이죠. 사사로운 디테일이 밝혀지지만 그것들은 그렇게 새롭지도, 대수롭지도 않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바람 피우고 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데, 그들이 어디에 비밀 아파트를 두고 있었나 따위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런데도 영화가 남자 주인공 더치의 끝도 없는 탐색을 보여준다면 이 영화의 중심 주제는 그 집착 자체임이 분명합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영화는 두 남녀의 로맨스 역시 잡아내려고 합니다. 네, 죽은 배우자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이런 관계가 시작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케이와 더치의 사랑은 더치의 탐색만큼이나 비중이 큽니다. 그것도 그들의 감정에 제대로 된 당위성이 설정되어 있지 않아 무척 억지처럼 보이지요.

더 큰 문제는 로맨스가 더치의 탐색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었으면 망집은 희미해져야 할 겁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거나 혼란에 빠질 수도 있지만 망집 자체와 로맨스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결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케이와 더치가 더치의 별장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입니다. 이 시퀀스의 후반부를 보세요. 한동안 케이와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던 더치는 갑자기 자신의 옛 집착으로 돌아와 아내의 열쇠를 케이의 코 앞에서 흔들며 같은 열쇠를 본 적 있느냐고 묻습니다. 도대체 이 남자는 그 동안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겁니까?

더 나쁜 건 더치가 영화 후반부에 자기 행동의 의미를 당연하다는 듯 축소하고 있는 겁니다. 그가 병실에서 한 말은 프로페셔널한 헐리웃 작가의 워드 프로세서에서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처구니없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나요? 우리는 등장인물 자신도 별다른 중요함을 느끼지 못하는 평면적인 사건에 끌려다녔던 겁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요. 특히 감정 이입을 중요시하는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는요.

듀나 그건 분명 중대한 실수입니다. 하지만 책임을 시드니 폴락에게만 돌리는 건 옳지 않습니다. 거기엔 어쩔 수 없는 헐리웃식 상업 논리 역시 개입되어 있지요. 두 주연급 남녀 배우가 만났으니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관객들 역시 그들의 로맨스를 바랄 거고요.

시드니 폴락의 실수는 로맨스를 삽입한 것이 아니라 로맨스를 제대로 삽입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전 더치의 망집을 다루면서도 충분히 좋은 로맨스를 깔 수도 있었다고 믿습니다. 플롯에 일관성을 주고 더치의 심리 묘사를 강화한다면요. 폴락이 그러지 못한 건, 그가 그동안 써왔던 공식을 별다른 생각없이 또 써먹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각색자인 쿠르트 뢰트케 역시 비슷한 안이함에 빠져 있었을 겁니다. 어떤 비평가는 폴락과 해리슨 포드가 다시 콤비로 나서지 말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진짜 다시 콤비로 나서지 말아야 할 사람들은 폴락과 뢰트케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더치 이야기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케이의 이야기도 함께 전개되지요. 뉴 햄프셔 주의 하원 의원인 케이는 선거 운동 도중 남편의 죽음을 접하고 그의 불륜과 갑작스럽게 그녀의 인생 안으로 들어온 새로운 남자 때문에 충격에 빠집니다. 안전한 길만 걸어오던 공화당 정치가에게 그건 대단한 방향 전환이지요.

로저 이버트는 [랜덤 하트]에 대한 그의 평에서, 만약 이 영화가 케이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었다면 더 흥미진진했을 것이라고 지적한 적 있어요. 이버트 영감의 의견에 늘 동의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동의하고 싶군요. 케이의 이야기는 더치의 이야기보다 훨씬 그럴싸하고 몰입하기 쉽습니다. 아마 케이의 시점으로 영화를 전개시키며 이 이야기를 충분히 발전시켰다면 영화는 더 좋은 영화가 되었을 겁니다. 그것도 시드니 폴락식으로요. 그가 훨씬 잘 다룰 수 있는 영역이니까요.

폴락의 선택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또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내사과 형사인 더치의 직업과 관련된 아주 커다란 에피소드가 붙어있습니다. 타락한 형사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있는 증인을 죽이고 더치가 그의 뒤를 쫓는 거죠. 그것만 떼어놓고 보면 괜찮은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왜 이런 이야기가 이렇게 커다란 비중으로 삽입되는 거죠? 더치의 수사 이야기가 본 스토리와 연결되는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있다면 마지막 사고 뿐인데, 그건 그냥 사고로 처리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편집이 덜 된 영화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만약 제가 아무런 정보도 없이 헐리웃 관객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면, 전 이 영화가 아직 최종 편집을 하지 못한 미완성작이라고 믿었을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완성된 영화를 보러 다시 한 번 영화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겠지요. 제대로 편집하고 재촬영도 하고 나면 꽤 괜찮은 영화가 나올 거라고 믿으면서요.

다시 말해 이 영화의 부분부분은 꽤 좋단 말입니다(오래간만에 이버트 영감과 여러차례 동감하게 되는군요.) 더치와 케이의 로맨스는 스토리 사이에서는 당위성 부족으로 고생하지만 그 장면만 딱 떼어놓고 보면 좋은 폴락식 연애 영화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더치의 내사과 이야기도 그대로 떼어놓고 보면 역시 상당히 잘 만든 헐리웃 액션 영화의 일부분처럼 보일 겁니다. 케이의 선거 운동 에피소드 역시 좋은 폴락식 영화의 일부처럼 보이고요. 생각해보면 더치의 지루한 탐색을 들어내고 나머지 장면을 토막내놓고 보면 나쁜 장면은 별로 없습니다. 일단 이것들을 뭉쳐놓으면 사정이 달라지지만요.

파프리카 배우들은 어떤가요? 전 해리슨 포드의 더치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배우 탓인지는 모르겠더군요. 캐릭터가 워낙 흐릿했으니까요.

듀나 각본 문제가 더 커요. 하지만 그가 연인 역을 그렇게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했다는 건 사실입니다. 아마 그의 재능이 그 쪽에 쏠려있지 않나봐요. 그러나 초반부에서 그가 보여준 연기는 괜찮습니다. 그가 잘하는 영역이니까요. 약간 풀이 죽은 보통 남자 말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틴 스코트 토머스가 너무 차갑다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배우 탓은 아닙니다. 충분히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각본이 막고 있으니까요. 또 이버트를 인용하게 되는군요. 그는 "왜 그들은 울지 않는가?"라고 물었었죠. 만약 이 배우의 그 차가움과 격렬한 감정 표출을 결합했더라면 매우 스코트 토머스다운 역이 나왔을 겁니다. 그리고 이 두 요소의 결합은 이 배우의 전공이나 다름없죠.

하지만 전 스코트 토머스의 연기가 여전히 흥미로웠습니다. 여전히 예전에 했던 역을 다시 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 배우의 미묘한 연기 디테일에 익숙한 사람들, 다시 말해 팬들은 상당한 단물을 빼낼 수 있죠. 아쉬워요. 더 좋아질 수도 있었는데.

파프리카 가능성, 가능성, 가능성... 끝도 없이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만 하게 되는군요.

듀나 아마 때가 늦지 않은 건지도 모릅니다. 맘잡고 재편집만 해도 영화가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아요? 폴락이 감독판에 생각이 있으면 좋을텐데. 일정 잡혀 있는 걸 보면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지만요. (99/12/14)

D&P

기타등등

[랜덤 하트]의 국내 텔레비전 광고와 포스터 카피는 올해 나온 영화 마케팅 중 가장 뻔뻔스러운 사기입니다. 광고만 보고 액션물이라고 속아서 극장에 온 불쌍한 관객들이 얼마나 많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