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게리 로스 Gary Ross

주연
토비 맥과이어....데이빗/버드 파커
Tobey Maguire....David/Bud Parker
리즈 위더스푼....제니퍼/메리 수 파커
Reese Witherspoon....Jennifer/Mary Sue Parker
조운 앨런....베티 파커
Joan Allen.... Betty Parker
윌리엄 H. 메이시....조지 파커
William H. Macy....George Parker
제프 다니엘즈....존슨 씨
Jeff Daniels....Mr. Johnson
J.T. 월시....빅 밥
J.T. Walsh....Big Bob
돈 노츠....TV 수리공
Don Knotts....TV Repairman

1.

[플레전트빌]의 미덕은 그 기본 아이디어에 있지 않습니다. 사실 '두 틴에이저가 마술 리모콘을 가지고 채널 다툼을 하다가 50년대 텔레비전 시트콤 안으로 빠져든다'로 시작하는 영화를 진지하게 여기는 것은 힘드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런 영화가 처음도 아닙니다. 정체불명의 마술로 주인공들의 육체를 뒤바꾸거나 엉뚱한 세상으로 날려버리는 영화들은 헐리웃에 낙엽처럼 쌓여있습니다. 특히 80년대와 90년대 초에 많이 나왔지요. [18 어게인], [백 투더 퓨처], [스테이튠], [칵테일 인생], [페기 수 결혼하다].... 이 영화의 각본가/감독인 게리 로스도 허무맹랑한 마술로 어른이 되어 버린 소년 이야기인 [빅]을 쓴 적 있습니다. 이미 전과가 있는 몸이지요.

그러나 [플레전트빌]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아이디어의 노골적인 진부함은 조금씩 사라져 버립니다. 이 영화가 선보이는 새로운 이미지들 때문일까요? 네, 그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게리 로스가, 이 얄팍해 보이는 아이디어가 보기만큼 얄팍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로스는 다른 작가들이 삽으로 표면만 대충 긁던 탄광 자리에 포크레인을 끌고 와 놀랄만큼 굵직한 광맥을 찾아냈습니다.

2.

50년대 시트콤으로 떨어진 90년대 아이들은 무엇을 할까요? 아마 마티 맥플라이처럼 하겠지요. 그네들이 가진 현대적 지식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면서 현대로 돌아올 길을 찾는 거죠. 물론 그러는 동안 그 자신도 성숙해서, 현대로 돌아올 때 쯤 되면 현대의 골칫거리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어른이 됩니다. 바로 그게 이런 판타지 이야기의 공식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데이빗과 제니퍼도 당연히 그렇게 합니다. 데이빗은 [플레전트빌] 에피소드에 대한 자기 지식을 동원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제니퍼는 거침없는 90년대 스타일로 순진한 플레전트빌의 아이들을 '농락'합니다. 여기까지는 공식대로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서서히 공식에서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데이빗과 제니퍼가 일으킨 변화의 바람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데이빗과 제니퍼가 그냥 50년대의 보통 가정에 떨어졌다면 이렇게까지 엄청난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떨어진 곳은 시트콤 속입니다. 50년대 사람들이 살았던 실제 세계가 아니라 당시 매스컴이 만들어냈던 환상입니다.

사실 50년대는 미국 사람들이 그리워할 만한 시대이긴 했습니다. 경제는 호황이었지요, 기술발달로 신상품이 공장에서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요, 전쟁 이후 그 사람들 자부심은 솟을 대로 솟아 있었지요... 그네들이 50년대를 무대로 한 영화를 만들 때 뿌려대는 그 풍요로운 색조는 조작된 것이 아닙니다. 영화 속의 [플레전트빌] 시리즈가 모방하고 있는 당시 문화상품의 안정된 느낌도 당연한 시대의 반영이었습니다.

그러나 50년대는 유토피아가 아니었습니다. [플레전트빌]과 같은 곳은 어디에도 없었지요. [플레전트빌]과 같은 텔레비전 시리즈가 그리고 있었던 곳은 그네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니라 그네들이 살고 있다고 믿고 싶어했던 세계였습니다. 슬프게도 아이젠하워 시대를 그리는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던 세계 역시 그 가상 세계인 것 같습니다만.

영화 [플레전트빌]은 이 세계의 허구성을 짓궂게 과장합니다. 화장실에는 변기가 없고 도서관의 책은 백지 묶음이며 섹스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유의지 대신 시트콤이 설정한 규칙과 대본 작가의 의지를 따르고요. 그래도 그들은 텔레토비처럼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데이빗과 제니퍼가 엉망으로 만든 새로운 상황 속에서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놓인 플레전트빌 사람들은 자신들이 결코 그 시트콤의 규칙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텔레토비 동산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은 텔레토비들 뿐입니다. 진짜 인간은 그런 곳에서 살 수 없습니다.

3.

게리 로스가 플레전트빌 사람들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무기 중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칼라입니다. 플레전트빌은 흑백 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쇼의 규칙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자 그들은 색깔을 얻게 됩니다.

간단한 트릭이지만 그 효과는 상당합니다. 우선 시각적인 영향력이 엄청나지요. 우리는 지금까지 색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잊고 있었습니다. 영화가 흑백 화면에 조심스럽게 칼라를 얹어주는 동안 관객들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색에 대한 경외감을 되찾습니다.

상징적인 기능도 분명합니다. 흑백에 색을 입히는 작업은 대상에 또다른 차원을 부여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50년대 시트콤의 스테레오 타입에서 진짜 인간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로스는 재치있는 부연 설명으로 색의 상징적 의미를 분명히 합니다. 사람들이 '차 안에서 뒹굴기만 해도 테크닉칼라로 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정작 변화의 주역인 데이빗과 제니퍼는 여전히 흑백입니다!

그건 물론 제니퍼와 데이빗 역시 플레전트빌 사람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연속극에서 튀어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들 역시 90년대에서 날아온 스테레오 타입입니다. 당연히 50년대 사람들에게는 칼라변환제인 섹스가 그들에겐 먹히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다른 약이 필요합니다.

4.

이 온화한 색의 메타포는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보다 적극적이고 분명한 두번째 의미를 부여받게 됩니다. 흑백 사람들이 컬러 사람들을 박해하는 부분은 분명히 인종차별과 파시즘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과연 필요했을까요? 저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그 부분에서 국면 전환이 한 번 필요해요. 그리고 'colored'라는 단어를 이렇게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놨으면서도 그걸 그냥 지나쳐야 한다면 저희라도 참 아까울 겁니다. 두번째 의미도 첫번째 의미 못지 않게 분명하고 딱 들어맞으므로 억지라는 비판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전체적인 내용에 비해 너무 심각하고 또 교훈적입니다. 특히 법정 장면에서 데이빗이 연설하는 장면은 3,40년대 헐리웃 사회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클린턴의 연설문 작가이기도 했던 로스에겐 자기 장기를 한 번 발휘할 기회이기도 했겠지만 아무래도 지나치게 깔끔해요.

그러나 로스가 그런 단점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연설 장면을 첨가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가 만들려고 했던 것은 지극히 카프라적인 영화입니다. 그리고 정말 어떤 영화를 좋아한다면, 사람들은 그 단점까지도 받아들이기 마련이죠.

5.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배우는 조운 앨런입니다. 사실 이 배우 혼자 만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뻔 했습니다. 베티가 서서히 컬러로 변하는 과정은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조운 앨런과 토비 맥과이어

그리고 앨런은 정말 빛이 납니다. 지금 저희 머리에 떠오르는 장면들은 모두 앨런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데이빗이 베티의 얼굴에 흑백 메이크업을 입혀주는 장면이나 베티의 눈물이 그 흑백 메이크업을 지워버리는 장면은 모두 아름답게 처리되어 있고 또 그 정서적 영향력도 강렬합니다.

앨런은 늘 하던 것을 또 한 것에 불과합니다. 성적으로 억압된 가정주부는 앨런의 트레이드 마크니까요. 하지만 저희가 왜 불평을 해야 하나요? 저렇게 잘 하는데?

다른 배우들도 좋습니다. 서서히 화가로서의 자신을 찾아가는 햄버거 가게 주인을 연기하는 제프 다니엘즈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그가 '진지한 배우'로 인정받던 그 옛날이 떠오릅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편 역의 윌리엄 H. 메이시도 훌륭합니다. 심지어 보통 성인 역에 눌리기 마련인 두 틴에이저 역의 토비 맥과이어와 리즈 위더스푼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만약 맥과이어와 위더스푼이 남들이 하는 정도만 했더라면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이 위태로워졌을 겁니다.

돈 노츠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은 미국인 관객들이라면 텔레비전 수리공으로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반가웠을 겁니다. 그 적절한 캐스팅을 보다 뼈 속 깊이 느꼈을지도 모르고요. 그러나 그런 것과 상관없는 저희같은 외국인 관객들의 눈에도 그의 짧은 출연은 인상적입니다.

6.

[플레전트빌]의 화면은 영화 전체를 칼라로 찍은 다음 흑백으로 전환시켜 그 위에 다시 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지만 디지탈 시대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간단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특수 효과만 판을 치는 골빈 헐리웃 블록버스터를 비웃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슬슬 그런 영화들의 공헌도를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 영화들이 앞에 서서 길을 닦지 않았다면 [플레전트빌]과 같은 영화들의 이미지 모험은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기술 발전은 전초에 선 블록버스터에게만 혜택을 주는 게 아닙니다. (99/04/12)

D&P

기타등등

1. 이 영화는 J.T. 월시의 마지막 영화 중 하나입니다. 명복을.

2. 50년대 복고 유행을 놀려대는 영화지만, 저희에게는 그런 복고 유행이 어느 정도 부럽게까지 느껴졌습니다. 50년대의 구닥다리 텔레비전 쇼가 아직도 힘을 잃지 않고 현대 시청자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게 부럽지 않나요? 우리같이 문화적 기억상실에 걸린 사람들에겐 어림없는 일입니다. 꼭 우리 탓은 아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