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로저 코먼 Roger Corman

주연
빈센트 프라이스....니콜라스 메디나/세바스티안 메디나
Vincent Price....Nicholas Medina/Sebastian Medina
존 커....프랜시스 바나드
John Kerr....Francis Barnard
바바라 스틸....엘리자베스 메디나
Barbara Steele....Elizabeth Medina
루아나 앤더스....캐서린 메디나
Luana Anders....Catherine Medina
안토니 카르보네....레온 박사
Antony Carbone....Doctor Leon
패트릭 웨스트우드....막시밀리안
Patrick Westwood....Maximillian
리네트 버니....마리아
Lynette Bernay....Maria
래리 터너....니콜라스 메디나 (아역)
Larry Turner....Nicholas Medina (as a child)
메리 멘지스....이사벨라
Mary Menzies....Isabella
찰스 빅터....바르톨로메
Charles Victor....Bartolome

고문실

에드가 앨런 포우의 [함정과 진자]는 무시무시한 고문 기계로 가득 찬 스페인의 종교 재판 고문실에서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액션의 밀도가 높은 단편이지요. 우리는 이 남자의 이름도 모르고 직업도 모르며 왜 고문실에 끌려왔는지도 모릅니다. 가끔 튀어나오는 고유명사가 없었다면 무대가 어디인지도 모를 뻔했고요. 단편은 순전히 이 남자가, 얼굴 없는 형리가 조종하는 고문 기계와 싸우는 과정에만 집중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장편 영화로 옮길 수 있을까요?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합니다. 일단 원작 그대로 옮기는 건 어림 없습니다. 하지만 원작의 장면을 클라이맥스로 설정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요. 그렇다면 오히려 각색가에게는 숨통 트이는 작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원작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끌어가다가 끝에 고문실 장면만 집어넣으면 되니까요.

이 로저 코먼 영화를 위해 리처드 매서슨이 한 일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매서슨은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썼습니다. 따라서 [어셔가의 몰락] 때와는 달리, 이쯤해서 스포일러 경고를 붙이겠습니다. 똑똑한 관객들은 포스터에 나온 배우들 이름만 보고도 줄거리를 꿰뚫어봤겠지만 말이죠.

영화의 무대는 16세기 스페인입니다. 동생 엘리자베스가 죽었다는 통보를 받은 영국인 신사 프랜시스 바나드는 동생의 남편 니콜라스를 방문하죠. 동생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니콜라스를 추궁하던 바나드는 니콜라스가 죽은 엘리자베스의 환영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던 건 니콜라스뿐만이 아니었어요. 그러다 마침내 진상이 밝혀지자 이야기는 정반대로 방향 전환을 합니다.

'너무 이른 매장'이나 '죽은 아내'와 같은 포우의 단골 소재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영화의 스토리는 전체적으로 [디아볼릭]을 닮았습니다. 매서슨이 일부러 스토리를 빌렸는지, 아니면 쓰다보니 닮아졌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여간 초자연적인 현상을 위장한 음모로 주인공을 궁지로 몰고가는 기본 스토리축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다보니 핵심이 되어야 할 '함정과 진자' 장면이 상대적으로 약해져버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미친 니콜라스는 자신이 고문관이었던 아버지라고 착각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던 사람들에게 복수합니다. 그러다 하필 재수없게 그 틈에 낀 프랜시스 바나드가 유명한 진자 아래에 놓이게 되지요. 왜 바나드냐고요? 진짜 적들을 진자 고문기에 놓으면 구출 과정의 서스펜스가 없기 때문이지요.

자, 내용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대충 보이지요? 진자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므로 내용상으로도 가장 중요한 갈등의 절정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나드는 국외자이고 니콜라스에게 별 유감도 없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전체적인 효과가 떨어져버려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자 장면이 시시하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반대로 굉장히 강렬해요. 코먼 식으로 천박하게 초현실적인 끔찍한 고문실 위로 거대한 진자가 흔들리며 내려오는 장면은 아무리 프랜시스 바나드가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해도 압도적이지요.

빈센트 프라이스의 고통스러운 연기 역시 이 영화의 중요한 장점입니다. 아주 조금 나오긴 하지만 바바라 스틸 역시 인상적이고요 (하지만 목소리는 더빙을 했더군요!) 나머지 배우들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 편이지만 그 이상을 할 필요도 없었죠.

여러 자잘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함정과 진자]는 여전히 흥미로운 고딕 호러입니다. [어셔가의 몰락]에서 느낄 수 있었던 박진감이 부족한 건 유감이지만요. (01/06/19)

DJUNA

기타등등

1. 원래는 정신병원에 갇힌 캐서린이 병원 사람들에게 니콜라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프롤로그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본론과 그렇게 잘 연결되는 것이 아니어서 잘려나간 모양이에요. DVD에는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2. 스튜어트 고든이 [함정과 진자]의 또다른 버전을 낸 적 있습니다. 이 영화와도 전혀 다르고 원작과도 전혀 다르지만 역시 꽤 괜찮은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 작품은 비디오로도 출시되어 있어요. 찾기는 조금 힘들겠지만요.